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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사회·정치·역사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by mariannne 2008. 10. 12.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목수정 지음, 희완 트호뫼흐 사진  |  레디앙)

나는 좌파도 진보도 아니건만 '열정과 진보, 그리고 유혹의 미디어 - 레디앙'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88만원 세대"와 이 책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때문이다. (세 번째 책은 심상정 씨의 "당당한 아름다움"이라니 더욱 기대가 된다!)

저자는 대학 시절, 시위현장의 '어느 깃발 아래도 서지 않고', "왜 재네는 '해방'이고 '민족'일까?"를 골똘히 생각하는 '노는 애들'이었다. "우리에게 김밥을 팔러 오는 아주머니들을 거칠게 손사래 치며 내쫓으면서 민중들의 삶을 입에 올리는 선배들을 보면서, 나는 '민중'이 평범한 시민들을 대상화하는 직업 운동가들의 용어임을 눈치챘다"고 고백하는 그녀가 '노는 애들'이었던 건, "일상적인 대화나 글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다가 오로지 정치적인 선동을 위한 비장한 어조의 문장에만 장식처럼 등장하는 이 단어를 집회 현장에서 들을 때마다, '여기 있는 우리'가 아니고 '어디  딴 데 모여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 같아서 매순간 위선적이라고 느꼈"(p.71~72)기 때문일까. 

대학 졸업 후 몇 개의 직장을 다니다가 이십대의 끝자락에서 완전히 바닥에 쓰러지게 만든 두 가지 개인적인 사건을 겪고난 후, 저자는 "너는 이제 뭐든지 할 수 있다. 넌 이제 자유다"라는 어머니의 말을 뒤로 한 채 프랑스로 떠난다. 어쩌면 그녀는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영혼이었을 수도 있을테고, 빠리라는 낯선 땅에서, 희완이라는 남자를 만나서 점점 변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는 '한국에서 자신의 발 앞에 놓인 좁은 선택의 틀에 괴로워하는 여성들을 볼 때마다' '다른 나라로 떠나라고 충동질'(p.101)한다. 

마흔이 채 되지 않은 그녀의 인생은, 스무살도 넘게 차이나는 희완(Riwan Tromeur)을 만나 비혼인 채로 아이를 갖고, '본의 아니게 점점 연봉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직업을 옮겨가면서도 누구보다 자유롭고, 누구보다 건강하고, 행복하며, 그리고 당당하다. 프랑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을, 태어난 나라 한국에 와서 유별난 것처럼 이해받지 못하는 그녀의 삶을 읽으며, "당시 민주노동당은, 미혼인 줄 알았던 직원이 어느 날 배가 불러와도, 6개월도 일하지 않았으면서 육아휴직 1년을 신청해도 어떤 종류와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거의 유일한 직장이었다"라는 대목에서는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혼자만 읽기엔 아까운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해줘야 하나.


책 속 구절 :


그런데 프랑스의 시위현장에선 오히려 이 단어의 부재가 귀에 걸려왔다. 듣자하니 프랑스에서도 옛날에는 민중이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 전쟁 직후, 공산당이 사회변혁의 최전방에서 왕성하게 기능하던 시기인 40~50년 전에는 볼셰비키 냄새를 팍팍 풍기는 민중 peuple이란 단어가 곳곳에 등장했다. 그러나 지금 이 단어는 구닥다리 구운동권의 용어가 되어 버렸고, 가장 급진적인 정치집단도 '시민citoyen'이나 '우리nous'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가르지 않는 '우리'는 운동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예를 들어,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LCR의 유명한 구호 '우리들의 삶은 당신들의 이익보다 소중하다Nos vies valent mieux que vos profits'는 최근에 치러진 프랑스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 세골렌 후아얄이 그대로 차용하기도 했다. (p.72)

프랑스에서 문화예술계 사람들은 확실히 배가 덜 고프다. 소위 대박난 스타가 아니더라도 투잡을 하지 않고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도 있다. 이는 프랑스가 소위 예술의 나라이고 사람들이 특별히 예술을 아껴서 그렇기 보다는, 18세기 이후 줄곧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부르짖으며 혁명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지금 이 순간, 당장,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에' 적용되는 자유, 평등, 박애의 외침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 탓에 비교적 평등하게 사회 전 영역에 사회보장제도가 적용되고 있다. (p.78)

피눈물 나는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써낸 다음 나는 지도교수에게 선물이라도 하나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이런 생각을 슬쩍 학과 친구들에게 얘기했더니 아이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너 미쳤니?", "저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라고 나라에서 월급 주는 거야. 우리가 있어어 저 사람들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거란 말이야.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감사해야 해."
또 하나의 기분 좋은 부재였다. 쿨한 선생과는 쿨하게 인연을 끝내기로 했다. 그에게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p.91)

내가 투자할 시간, 투자할 돈, 그렇게 해서 딴 학위가 나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장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더 분명하고 안전한 선택을 매순간 계산해야 한다면, 한 순간도 인생은 나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불만은 터뜨리고 욕망은 충족시키면서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 그러나 내가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진정한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모두가 욕망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해진 일반적 욕망의 리스트일 뿐인지를 가늠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p.100)

내 경험에 따르면 가장 역겨운 그룹은 시의원, 구의원들이다. 이 사람들은 오면 꼭 쓰레기 처리장 같은 데를 방문하려고 한다. 그나마도 쓰레기처리장까지 가서도 그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 관행을 되풀이 하다가 결국 이곳의 쓰레기 처리장에서 한국인 관광객 방문 금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교통관련 기관에선 이곳의 지하철 공사를 방문도 안해 놓고 방문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출장보고서를 현지 여행사 직원에게 써서 보내라고 하기도 한다. [...] 미장원 원장들이 사흘 정도 연수를 받고 미용실에 자랑스럽게 걸어놓을 졸업장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없느냐, 포도주 시음을 단체로 하고 나서는 거기서 손님들 이름을 각각 새긴 포도주 병을 만들어 줄 수는 없느냐, 별별 기이하고도 우스운 주문을 한번 찔러보듯이 하는 인간들의 요구에 일일이 대꾸를 해주어야 하는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p.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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