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소설75

흑산 黑山 흑산 黑山 김훈 저 | 학고재 이것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먹고, 일하고, 세금을 내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고, 다투고, 화해하고, 믿고, 배신하고 ... 그렇게 살다 죽어가는 이야기다.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고향을 떠나고, 어떤 이들은 죽은 아이의 살을 먹으며 ‘죽여서 먹는 게 아니고, 죽어서 먹는다’고까지 하는데, 궁에서는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다며 사학죄인을 잡아 족칠 생각에 여념이 없다. 불과 140여 년 전의 일이다. 사람의 목숨이 가볍고 하찮게 다루어지는 시절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따로 없다. 흑산으로 유배된 정약전이 주인공인가, 모르겠다. 정약전에게는 위로 형 약현이 있고, 아래로는 동생 약종, 약용이 있었다. 형제 중 맏이인 약현에게는 명련이라는 딸이 있어, 황사.. 2012. 11. 28.
가을 여자 가을 여자 오정희 저 | 랜덤하우스코리아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들이나 휙 스쳐간 단상, 이미지, 때로는 한 편의 긴 소설을 위한 스케치가 짧은 소설들로 형상화되기도 하였다"는 글들, "여러 해에 걸쳐 틈틈이 쓰고 발표했던" 그 짧은 글들을 읽고 있자니 내 삶도 이렇게 자잘한 사건들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집, 또는 옆집, 앞집,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몇 년 전, 혹은 어제, 아니면 내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들. 책 속 구절: 저녁설거지를 하며 활란은 자꾸 부엌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문상객인 듯한 사람들이 몇몇씩 무리지어 자동차에서 내리고 탔다. 단지 분주하고 버잡스런 분위기일 뿐 망자의 저승길 밝힌다는 곡(哭)의 습속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렇게 살다가 어느.. 2012. 7. 16.
두근두근 내 인생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저 | 창비 남다른 재능을 가진 젊은 작가 김애란의 장편소설이다. 스물 다섯에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고, 단편소설집 “달려라 아비”와 “침이 고인다”를 내 놓은 후, 첫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써서 ‘역시 김애란’이란 소리를 듣고 있는 작가. “소설을 쓰는 데 배움이나 경험이 반드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라는 삼십 대 초반의 작가는, 그래서인지 조로증에 걸린 열일곱 소년 이야기를 잘도 써냈다. 1급 신체 장애인으로, 암투병을 하다 돌아가신 고 장영희 교수는 어느 잡지에 ‘천형天刑같은 삶’이라는 자신의 인터뷰 기사 제목을 보고 불쾌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토록 파워풀한 그녀의 삶에 왜 그리 괴상한 단어를 붙였나? 이 소설 속 한아름 소년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의 .. 2012. 4. 5.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저 | 문학과지성사 음침한 표지의 이 소설집 제목은 하나의 소설에서 따온 게 아니라, 이 소설집의 전체를 대신하는 것이다. 한동안 아무도 이런것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이 젊은 작가는 왜 이렇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우울한 것들만 이야기하는걸까? 열 세 살의 소녀는 구걸하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역에서 노숙을 하다 아이를 배고(열세 살), 여대생은 빚 때문에 대리모를 자처하고(엄마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엄마에게 버림받은 한 여자는 그 이후 고속도로 갓길에 서서 항구로 데려다주는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몸을 허락하고(순애보), 돈이 없어 노래방에 나가기 시작한 여자는 남편과 아이를 잃고 나서 남편의 형과 동거하며 학대를 당한다(오늘처럼 고요히). 이 소설에.. 2012. 2. 3.
환영 환영 김이설 저 | 자음과모음(이룸) 경향신문에서 2012년 주목할 만한 작가로 꼽은(“김영하•김애란•김이설, 이 소설가 3명을 주목하라”) 김이설이 2011년에 내 놓은 경장편 소설. ‘가난의 늪’으로 빠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온갖 불행이란 불행은 다 끌어안고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참을 만큼 참고도 더 참아야 하는 건 가족”이라고 했지만, 그 가족을 견디면 견딜수록 희망과 현실의 간격은 더욱 커져만 가고, 서울 근교의 닭백숙집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해봤자 그녀의 삶은 더욱 무거워질 뿐이다. 불편하지만 알아야 할 현실의 이야기인가. 그럴 것이다. 2012. 1. 16.
소수의견 소수의견 손아람 저 | 들녘 서울대에서 미학을 전공했고, 멘사(Mensa) 회원이기도 한 손아람은 힙합가수 출신의 소설가다. 서울대나 멘사 따위의 이력이 먼저 언급되는 걸 본인은 썩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독자들에게는 그의 첫인상을 결정지을 중요한 키워드일 것이고, 그 인상은 그의 두 번째 소설 “소수 의견”으로도 이어진다. 서른 나이에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게 놀랍기만 하기 때문이다(언빌리버블!). 그는 얼마동안 이 책을 준비했을까? 2009년 1월에 생각했을 것이고, 2010년 봄 이전에 탈고했어야 하니, 기껏해야 일 년 아닌가? 책머리에는 “사건은 실화가 아니다. 인물은 실존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적혀 있어 소설이 논픽션이 분명하다는 반어적 암시를 준다. 소설에서는 서울 아현동 뉴타운 재개발 구역에서 .. 2011. 12. 14.
Double 더블 Double 더블: side A, side B 박민규 저 | 창비 소설가 박민규의 단편집이다. 추억의 LP판을 모티브로 하여 두 권을 세트로 출간하면서 1권, 2권이나 상, 하가 아니라 sideA, sideB로 이름붙였다. 크기는 보통의 책 크기지만, 특이하게 정사각형의 판형으로 제작했다. 그것 말고는 그냥 보통의 단편집이다(책에서 노래가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작가 박민규가 "카스테라" 이후 발표한 작품들을 모은것이고, 작가의 유우머와 재치, 기발한 SF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단편집이다. 박민규의 팬이라면 뭐 당연히 읽어야 할 것이고. - 이렇게 오랜만에 나오셨다니! 이번 작품집에서는, 직장생활만 열심히 하다가 쓸쓸해져버린 중년 남자, 또는 은퇴 이후 황혼의 유감.. 2011. 1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