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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비소설

바다의 기별

by mariannne 2009. 1. 27.


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짧은 수필 몇 편,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 두 편,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저자의 소설, 에세이 집의 서문들을 모아 놓은 책. 일상의 진지함과 완고함, 그러면서도 세상에 대한 따뜻하고 감성적인 시각을 가진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그를 '여성 심리의 달인 마초 김훈 선생'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그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팍팍한 삶이 힘겨운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될 만한 착한 책이다.

책 속 구절 :
나는 춥고 어두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할 일이 무섭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의 무사한 하루하루에 안도한다. 행복에 대한 내 빈약한 이야기는 그 무사한 그날그날에 대한 추억이다. 행복이라기보다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에게 휴대폰을 사 주었고 용돈이라며 15만 원을 주었다. 첫 월급으로 사 온 휴대폰을 나에게 내밀 때, 딸아이는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그 자랑스러움 속에는 풋것의 쑥스러움이 겹쳐있었다.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그 아이는 아마 월급쟁이로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p.33)

창세기 이래로, 인간은 죽음으로써 지구를 구해냈을 것이다. 다들 죽어 없어지지 않았다면, 또 다들 살 자리가 없어서 죽었을 터이다. 그래서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세계와 후손을 위해서 베푸는 가장 큰 보시이며 은혜일 것이다. 나는 산 자들의 그 어떤 위업도 그 죽음이 베푸는 은혜만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산 자는 필멸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지는 못한다. 소각로 바닥의 흰 뼈를 들여다 보면서 나는 알았다.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언어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 장모의 초상을 치르면서 나는 그 절대적인 개별성에 경악했다.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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