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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여행책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by mariannne 2022. 12. 31.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 아프지 말고, 상처받지 말고, 견디지 말고 
박민우 저 | 플럼북스


"1만 시간 동안의 남미"가 특출나게 재미있어 기대치가 높아서 그런지 그 다음에 나온 "1만 시간 동안의 아시아"는 '꽤 재미있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이다. 둘 다 그다지 관심없는 나라이고, 작년에 출간되자 마자 서점에 가서 보니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라 구매하기를 망설였는데, 몇 달 만에 중고책방에 반값에 나왔길래 샀다. 밤에 읽기 시작해서, 다음날 저녁까지 다 읽었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그냥 끝까지 단숨에 읽게 되는 재미와 흡입력은 여전하다. 지금은 어디 있나 모르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국에서 '생활 여행자'로 지내고 있었으니, 곧 태국 여행기도 나올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저자는 2013년에서 2014년까지 (아마도 4개월 정도를) 인도의 몇몇 도시와 파키스탄 훈자에 머물었다. 사실 '훈자'에 가기 위해 인도를 지나쳐간 것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 여행기의 정점은 훈자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책 제목이 '인도'와 '파키스탄'이 아니고 '인도'와 '훈자'다. 하루에 3천 원정도 하는 숙소에서 자고, 한 끼에 1~2천 원짜리 음식을 사 먹으며 한 달에 35만 원으로 버티는 생활이었다. 인도는 불친절하고, 비위생적이고,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거짓말쟁이들이 그를 괴롭혔지만, 어쨌든 물가는 매우 쌌고, 어떤 곳은 몹시 아름다웠다. 훈자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공식적으로 열여덟 시간, 비공식적으로 스물두 시간 정도 걸리'는 외진 곳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곳은 인도와 달리 덥지도 않았고, 풍경은 감동적이었고,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한국 사람들 몇을 만나 어울리기도 했다. 소심한 수다쟁이 저자는 이곳이 정말 마음에 들었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더 깊이 알기 전에, 마음 아파지기 전에'(p.449) 떠나야겠다는 애정 넘치는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그나저나 박민우가 원래 이런 식으로 글을 썼나. 소설가 박민규가 즐겨 사용하는 형식의 문장이 눈에 많이 띄였다. 


책 속 구절: 

영화 "김종욱 찾기"의 주인공 공유도 오믈렛숍 방명록에 글까지 남겼다. 너무너무 맛있다는 그의 추천에 진심이 느껴졌다. "김종욱 찾기" 촬영지라는 이유로 한국인 여행자가 조드푸르엔 유난히 많았다. 이곳에 오면 공유나 임수정 같은 인연이 짠하고 기다릴 거야. 그런 기대를 정말로 한다고 한다. 나 때는 "비포 선라이즈"를 보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를 기대했던 친구들이 있긴 했다. 비주얼이 영화배우여야 하는 누군가를 기대하며 유레일패스를 사던 수많은 한국인들! 영화의 로맨스를 현실에서 기대하는 당신은 아침 드라마에 미쳐 악역 배우 뺨을 때렸다는 이마트의 할머니를 욕해선 안 된다. (p.197) 

'뭐지?'
노트북 가방에서 샴푸가 새고 있었다. 독일제 탈모 샴푸 알페신인데 너무 소중해서, 노트부구 배낭에 같이 넣어두었다. 웬만한 귀중품보다 더 소중했으니까. 세계 최초의 카페인 샴푸로 유럽 특허까지 받았다. 탈모 사이트에서 선풍을 일으킨 샴푸여서 터지고, 샐까 봐 노트북과 함께 넣어둔 것이다. 이렇게 문장으로 정리하고 보니 바보, 천치란 단어도 아까운 한 남자가 억울해하고 있었다. 
노트북은 특허받은 카페인 샴푸에 골고루 젖어 있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저장하는 노트북이, 밥줄이, 응급실도 없는 첩첩산중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물티슈를 꺼내 샴푸 자국을 빡빡 닦아냈다. (p.232~233) 

파키스탄. 
모래바람은 끝났지만 나는 떨고 있었다. 떨면서 파키스탄의 훈자를 생각했다. 거리상으론 파키스탄이 코앞이다. 예전에는 사막에서 국경을 넘는 기차가 다녔다. 이제는 암리차르Amritsar라는 도시에서 두 발로 넘어가는 것뿐이다.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신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느닷없는 모래바람 같은 여행이 되지 않기를, 예측할 수 있는 일들만 일어나기를 바랐다. 죽을 때까진 죽고 싶지 않았다. 해가 어서 떴으면 했다. 모래를 착착 쓸어 담고, 보통의 방에 누워, 보통의 숨을 마음껏 들이켜고 싶었다.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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