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소설은 잘 읽히고, 재미있다. 읽는 즐거움이 있고, 이야기에 빨려들어간다. 이번 소설들도 좋았다. 좀 싱겁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단편의 주인공들은 지난번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었다. 작가가 나이들면서 주인공들도 같이 늙어간다. 화자는 마흔의 독신남("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이거나, 열여섯살 딸을 둔 엄마("아무것도 아닌 것")이거나, 결혼한 지 6년이 지난 워킹맘("서랍속의 집"),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낸 엄마("안나") 다. 열여섯살 딸의 출산을 지켜보는 엄마이야기 "아무것도 아닌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정이현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는데, "오늘의 거짓말"이 가장 좋았다. "달콤한 나의 도시"와 "낭만적 사랑과 사회"도 재미있었다. 알랭 드 보통과 한 편씩 나눠서 쓴 "사랑의 기초"와 인터넷에 연재한 "너는 모른다"는 별로였고, 장편소설 "안녕, 내 모든 것"과 산문집 "풍선"은 재미없었(던 것 같)다. 이 책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중간쯤이다.
나중에 생각이 안날까봐 적어두는 자세한 줄거리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고양이 인형 샥샥과 함께 사는 마흔살의 남자 희준은 실버타운에서 적은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미스조는 죽은 아버지의 옛 애인인데,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이 닿아 가끔 만나 밥을 먹곤 했다. 어느날 미스조가 암 투병 중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녀가 키우던 거북이 한 마리(17세)를 희준에게 남기는 바람에 반신욕 욕조를 구매해 바위(거북이 이름이다)를 키우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지원은 열여섯살 먹은 딸이 복통을 호소해 병원에 데려간다. 딸은 임신 24주였고, 792그램의 미숙아를 출산한다. 딸의 남자친구는 동갑내기 승현이다. 승현의 엄마 미영은 프라이팬 유리 뚜껑이 폭발해 산산조각이 나는 바람에 AS센터와 실랑이를 하던 중 지원의 연락을 받는다. 지원이나 미영 모두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딸아이의 임신사실은 당사자 둘 말고는(이제 둘의 엄마들이 알게됐지만) 알지 못한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는 급히 수술을 해야했고, 지원은 수술을 망설인다. 수술을 미루던 중, 지원은 갓난아이가 위독해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수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우리안의 천사
동거남인 남우에게 어느날 배다른 형이 나타난다. 형은 빚이 많은 의사이고, 어릴때 남우를 두고 집을 나간 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있다고 했다. 형은 남우에게 아버지가 죽으면 둘 모두 유산을 받을 수 있다면서, 아버지가 사용하는 인슐린 주사기만 바꿔치기 해주면 된다고 한다. 남우는 형대신 그것을 실행에 옮겼고, 그 이후 형은 연락을 끊는다.
영영, 여름
한국인 엄마와 일본인 아빠를 둔 리에는 뚱뚱한 외모 탓에 전학을 갈 때마다 놀림을 받는다. 이번에는 K라는 나라로 가게 된 리에. 거기서 메이라는 동양인(한국인) 친구를 만나 친해졌지만, 알고 보니 북한에서 온 권력자의 자식이다.
밤의 대관람차
퇴직 후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남편과 로스쿨에 다닐테니 경제적 지원을 해달라는 딸 때문에 25년째 근속한 여자고등학교를 10년은 더 다녀야하는 쉰세 살 '양'씨. 어느 겨울, 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요코하마로 해외교류프로그램을 떠난다. 동행한 신임이사장 "장"은 "양"이 오래 전 만나다 헤어진 노령의 정치인 "박"을 생각나게 한다.
서랍속의 집
치솟는 전세값에 집을 사기로 한 부부. 계약하기로 한 17층 집은 구경하지 못하고, 같은 구조의 6층 집을 확인한 후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이사하기 전날, 혹시나 해 그 집 근처에 가보니, 17층에서 쓰레기더미가 실려나오고 있다. 2년 전 그집에서 자살한 아내때문에 정신병을 얻은 남편이 집 가득 쓰레기를 모아놓은 것이다.
안나
박사학위까지 가진 주부 "경"은 아이의 영어유치원 보조교사들 중에서 "안나"를 발견한다. "경"이 결혼 전 삼십대 초반에 잠깐 라틴댄스 동호회에서 춤을 배운적이 있는데, 그때 같이 활동한 10여 살 어린 동생이다. 학부모와 교사가 사적으로 만나면 안된다는 규정이 있지만 둘은 밖에서 따로 만나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다. 어느날 안나가 나눠준 유통기한이 며칠 지난 요구르트를 먹은 원생들이 탈이 나면서, 안나는 학원을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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