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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유령 퇴장

by mariannne 2016. 1. 24.


유령 퇴장
필립 로스 (지은이) | 박범수 (옮긴이) | 문학동네
2014-08-01 | 원제 Exit Ghost (2007년)  

배경은 뉴욕, 2004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즈음 며칠간의 일이다. 뉴욕을 떠나 11년 동안 버크셔 시골 마을에 은둔하던 주인공 네이선 주커먼은 그동안 전립선 절제를 위해 도시에 한 번 나왔고, 이제 다시 요실금 치료를 위해 뉴욕을 찾았다. 도시를 떠날 때는 나름 혈기 왕성한 예순이었고, 지금은 일흔 하나의 노구가 되었다. 전립선 절제 후 '신경 손상에 의한 발기부전을 피해가는 행운'을 누리지 못한 채, 소변 줄기도 제대로 조절할 수 없는 그런 노인이 된 것이다. 

작가의 다른 소설 "전락"과 마찬가지로, 노년의 로맨스에 대한 환상이 여기에서도 펼쳐진다. 이번에는 정말 그저 환상일 뿐이다. 상대는 물론 젊은 미모의 여성이다. 뉴욕의 아파트와 조용한 시골집을 바꿔 살고 싶다는 30대 초반의 부부가 낸 광고를 보고 홀린듯 찾아간 네이선 주커먼은 그곳에서 제이미 로건을 만난다. 제이미에게 네이선은 '유명한 작가 선생님'이었고, 네이선에게 제이미는 '왜 내 여자가 될 수 없는지' 한탄스럽기만 한 매력적인 여성이다. 하지만, 뉴욕의 아파트에는, 테러의 위험에서 벗어나 당분간 시골에서 살고 싶어하는 부부와 "성난 진보주의자이자 분노한 시민의 역할은 이미 다했다"며 세상 돌아가는 것 따위는 별 상관 없다는 노인이 있을 뿐이다. 

부부의 지인인 리처드 클리만은 지나치게 혈기왕성한 젊은 프리랜서 기자로, 오래 전에 죽은 작가 E. I. 로노프의 치부를 드러내는 전기를 쓴다며 네이선을 괴롭힌다. 기억력마저 잃어가는 네이선(그래서 그는,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기록을 하기 시작한다)은 대체 리처드가 왜 그토록 자긍심을 갖고 우쭐대는지 알 수 없는데다가, 자신이 죽고 나면 누가 자신의 생애 실수를 파헤칠까 걱정이 되기까지 한다. 

줄거리는 그 정도다. 주인공 네이선 주커먼이 뉴욕에서 보낸 며칠 간의 일일 뿐이다. 하지만 필립 로스는 왜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얘기를 한걸까? 우선은 세대간의 문제다. 특히 정치적 견해에 대해 다른 모습인 사람들. 유대인으로서 당연히 부시 재선에 거품을 물어야 할 지경이지만, 젊은 사람들이 선거 결과를 보고 암담해할 때 네이선은 의연했다. 이어지는 건, 늙어간다는 문제다. 마음은 젊은 여성에게 빠져 있지만, 기저귀를 차고 다니며 속옷이 젖게 될 지를 걱정하고 있는 동년배의 여인, 뇌종양에 걸린 에이미를 보며 서글퍼해야하는 현실이다. 거기에 작가로서의 고뇌도 있다. 죽어서도 유명세에 시달려야하는, 유명하지 않아도, 그저 알려져만 있어도 말이다. 도시에서 보낸 며칠은 네이선에게 너무 많은 갈등과 혼란을 주었을 뿐이다. 

배경이 뉴욕이라 그런지, 폴 오스터를 읽는 기분이 많이 들었다. 


책 속 구절: 

나는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육 년에서 팔 년 정도 됐겠군. 그러니 이들의 정신에 미국인이라는 유대감을 형성한 일련의 극단적인 역사적 충격 중에서도 케리가 부시한테 패배한 것이 두드러진 위치에 놓일밖에. 베트남전이 공적으로 이들 부모 세대를 규정하고, 대공황과 2차 대전이 내 부모와 그 친구들의 기대를 구조화한 것과 같은 거지. 200년엔 부시에게 대통령 자리를 안겨준 노골적인 속임수가 있었다. 2001년에는 테러 공격이 있었고, 불타는 쌍둥이빌딩의 높은 층 창문에서 사람들이 인형처럼 뛰어내리던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제 이 사건이 있다. 그의 기만적인 핵무기 창작동화와 그 못지않은 덜떨어진 정신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혐오하는 그 '무식한 인간'이 거둔 두번째 승리가. 이번 사건은 나 같은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동생들과도 이들을 구별해줄 이들 세대의 공통된 경험이 될 것이다. 아들 부시의 행정부는 이들에겐 행정부가 아니라 사법적인 수단으로 권력을 탈취한 정권일 뿐이었다. 이들은 2004년에 주권을 되찾고자 했으나 끔찍하게도 그러지 못했고, 어젯밤 열한시 무렵, 단지 패배감만이 아니라 또다시 알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속아 넘어갔다는 느낌까지 받았던 것이다. (p.131)


나는 그가 로노프를 끝장내고 난 뒤 그 맹렬한 관심을 내게 돌리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다. 내가 죽고 나면, 누가 내 인생 이야기를 리처드 클리먼한테서 보호해줄 수 있겠는가? 로노프는 녀석이 나에게 달려들기 위한 문학적 징검다리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 "근친상간"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실수 탓에 모범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게 될까? 나의 엄청난, 추악한 비밀. 분명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또한 놀라운 일은 그때까지 쌓아온 누군가의 훌륭한 기량과 업적이 전기 집필을 위한 조사라는 징벌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언어를 지배하는 사람, 평생 이야기만 만들어온 사람이 죽고 난 후엔 결국,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깅거된다면, 그에 대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기억된다. 그가 숨겨왔던 비열함의 낙인이 발견되고, 타협이라곤 없는 솔직함과 명료함과 자기 확신으로, 도덕성이라는 가장 미묘한 문제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게다가 적잖은 기쁨까지 가미되어 상세하게 기술된다.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나였다. 그 뻔한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하긴 처음부터 내내 알고 있었는지도. (p.358~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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