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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비소설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by mariannne 2015. 9. 29.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 윤진서 산문집

윤진서 (지은이) | 그책 | 2013년


배우 윤진서가 쓴 게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책이다. 특별한 주제 없는 단상, 여행의 기록이 있는 작고 얇은 책이다. 그래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어, 글을 참 잘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제목은 영화 "비브르 사 비"에서 가져왔다. 누벨바그의 대표 감독 장 뤽 고다르가 만든 1960년대 작품이다.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란 뜻의 제목을 선택한 건, 아마도, 흔들리지 않는 배우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런 에세이라면 좀 더 읽어보고 싶기도 하다.  

  


책 속 구절: 


불현듯 창문 밖으로 큰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큰 소리에 깜짝 놀라 창문을 열어 보니, 사람들이 온 동네를 휘저으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간판과 깨진 유리창이 보였다. 거리에는 오로지 소리를 지르는 시위대만 있을 뿐, 평범한 시민은 자취를 감춘 듯했다. 죽음의 소식 뒤, 눈앞에서 일어난 폭력이라 더욱 무서웠다. [...] 그날, 한 번도 빠진 적 없던 어학원을 처음으로 결석했다. 그리고 온몸이 굳어버린 듯 창문 앞에서 미동도 않고 하루를 보냈다. 


다시 죽음을 애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건 여느 날과 다름 없이 평온한 파리의 모습을 되찾은 후였다. 그러고 보니 화장실 가는 것도 잊고 오후를 보냈다. 저녁이 돼서야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용기를 내어 아파트 문을 나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문을 반복하면서. 


나는 항상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잠들곤 했다. 하지만 그날의 사건들은 오늘이 어제만 같다면 좋겠다는 뜻밖의 바람으로 나를 인도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말.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 것 같은 그 말. 


평범하고 조용해 보이는 식당을 찾아 들어가 양파수프를 주문했다. 평범하고 조용해야만 했다. 그게 좋았다. (p.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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