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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사회·정치·역사

빨간 신호등

by mariannne 2012. 10. 19.

 

빨간 신호등 
홍세화 저 | 한겨레신문사


이 책은 홍세화 씨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묶은 것이다. 때는 김대중 정권이고, 정치인 노무현이 보수세력으로부터 ‘좌파 정치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다. 진보세력은 맥을 못추는 때였고, 신자유주의는 그 정체가 드러나기 전이다. 현재(2012년) 진보신당 대표인 홍세화 씨는 프랑스 망명생활을 끝내고 2002년 귀국했으니, 이 칼럼들은 빠리에서 시작하여 서울에서 마무리한 것이다.

 

그는 ‘사회정의를 돌보지 않은 경제성장’을 경계하며, 따라서 무질서를 가져올지라도 파업노동자의 행동을 지지한다. ‘낙선운동’을 정치 회복을 위한 마지막 희망으로 생각한다. 인권과 사회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소수파인 동성애자를 인정한다. 또한 보수세력의 지역주의를 혐오하고, 조선일보는 반대, 공기업의 사유화 역시 반대한다. 프랑스라는 선진국가에서 수십 년을 살았기 때문인지 그의 눈에 이 땅은 여전히 불합리하고 못마땅하다. 그건 결코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권과 사회 연대를 생각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 차이 때문이다. 2003년에서 10년이 지난 지금, 책 속 사회에서 조금은 벗어났는가? 어느 면에서는 그렇고, 또 그렇지 않다. 시민 의식은 성장했지만, 기득권의 세력은 더욱 단단해진 것이다.
 
책 속 구절:
중도 좌파로 분류되는 <르몽드>의 기본 노선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한 기자의 답변은 ‘프랑스에 맞는 사회주의’였다. 지난 20년 중 14년 동안 사회주의자당(사회당)이 집권한 프랑스를 구 소련이나 동구의 사회주의 국가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여기서 사회주의의 여러 형태에 대하여, 또 사회민주주의보다 주로 사회주의라고 말하게 된 프랑스의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기로 하고, 서구의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사회주의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정돼 왔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 자체가 건실해졌다는 점은 분명히 말하기로 하자.

자유주의자들에게  경제를 원활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소중하다면, 사회주의자들에겐 사회에 뿌리 내린 ‘보이지 않는 연대’가 소중하다. 프랑스의 경우, 오래 전부터 소득이 100원이면 그 중 45원 정도를 사회보장비와 세금으로 내도록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다. 완벽한 무료 공고육과 또 완벽한 의료보험, 실업보험과 연금 등 복지사회의 비밀은 국민소득이 높다는 점에서보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기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소득 중 절반 가까이 투자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정권이 보수 우파로 바뀌어도 이미 제도화된 사회주의의 요구를 대부분 ‘보수’하기 때문에 45원 중 1원을 줄이기 어렵다. 한국의 열악한 사회안전망과 교육 상황을 돌아볼 때, 이와 같은 투자가 튼튼한 사회 통합, 더욱 나은 삶의 질을 획득하는 관건임은 자명하다. 이러한 관점을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사회주의자가 되겠다. (p.129~130)

한국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연대의식은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경쟁의식과, ‘나만 당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집단적 무의식에 압도되어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 연대를 향한 길이 개인의 존엄성을 추구하고 존중하는 길 이외에는 없는’ 것이라면, 사회를 관통하는 연대의식은 사회가 사회구성원들 각자의 존엄성을 어떻게 인식하는 가에 따라 규정된다.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듯이, 단 한 사람의 인간적 존엄성이라도 무시될 수 있는 사회에서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연대의식은 정착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국가폭력에 희생되는 것을 용인해선 안되는 까닭은 그 사람의 인권 자체가 중요하거니와 그래야만 사회의 연대의식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대의식은 사회정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다. (p.148)

한편, 이회창 한나라당 경선 후보는 젊은 학생들과 나눈 한 대담에서 젊은 판사 시절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이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을 ‘법살’하는 데 참여했던 사실에 대해 “조금도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좋다! 그의 법살 참여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기기로 하고 여기선 그냥 넘어가자.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회창 씨에게선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나의 철학은 인간이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에 담겨 있는 인간적 고뇌나 성찰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적 고뇌나 성찰이 부족한 사람에게서 우리는 어떤 정치철학을 기대할 수 있을까? 광신자들은 광신이기 때문에 열성을 부리지만 기득권자들은 기득권을 놓치기 싫어 열성을 부린다. 돈을 땄다가 잃은 노름꾼이 집착과 욕심으로 열성을 부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인제 후보는 노무현 후보를 ‘좌파’ 정치인으로 규정하고,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정권을 ‘좌파적’ 정권으로 규정하는 열성을 보였다. 여기선 다시 그런 규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기로 하자. 잘 알려지다시피 정치 용어에서 ‘좌우’의 구분은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 루이 16세가 소집한 일반회의에서 귀족계급과 성직계급이 왕의 오른쪽에, 시민계급이 왕의 왼쪽에 자리잡은 데서 비롯되었다. 면세 등 각족 특권을 누리면서 ‘지금처럼’을 외쳤던 ‘오른쪽’과 변화를 요구했던 ‘왼쪽’ 사이의 갈등은 급기야 신분 질서에 기초한 봉건적 왕조로부터 근대 ‘공화국’을 탄생시키는 대혁명으로 치달았다. 이를테면 최초 ‘좌파’들의 투쟁 덕분으로 공화국이 생긴 샘인데, 대한민국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들이 좌파를 무조건 부정하는 발언을 마다지 않는 것은 그들의 무지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봉건 왕조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싶은 욕심을 속이지 못해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저급한 포퓰리즘에서 온 것인가? (p.165~166)

‘인간의 얼굴을 멀리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판치는 세상이긴 하다. 또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는’ 정치 풍토가 거대 신문들에 힘입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사회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치적 참여는 고귀한 사랑이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연대를 실천하는 행위가 곧 정치행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치꾼들조차 모두 한 목소리로 주장하듯이 정치가 사회구성원들의 인간적 삶의 영위를 목표로 한다고 할 때 정치인들부터 인간의 얼굴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p.167)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에서 내면적 고귀함은 이미 물질적 고귀함, 곧 호사스러움에 밀려나 실종된 지 오래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물질적 호사스러움이 내면적 고귀함을 몰아낸 것이다. 어느 정권 아래서든 너절한 부패 양상이 계속되는 것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러한 천박한 가치관이 정치적 영향력과 만나 자연스럽게 부패로 발전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부패를 비난하지만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의 속내 일부에는 부패를 저지를 만한 영향력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구 불만도 들어 있을 수있다. 요컨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천민성과 사회구성원들의 자기성찰 부족은 애당초 부패를 멀리할 수 있는 가치관 형성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 사회에 봉건성까지 잔존한다고 할 때, 부패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우선 자기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인물을 찾아내고 그 영향력을 키우는 데 있을 것이다. (p.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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