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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밑줄] 이덕희, 그대는 충분히 고뇌하고 방황했는가

by mariannne 2012. 3. 28.

이덕희의 "그대는 충분히 고뇌하고 방황했는가" 중에서


삶의 아이러니

[...] 그러나 까뮈의 경우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명제는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만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자기의 사상을 전개하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앞서 말한 ‘말뚝’의 경우나 그외 막연한 염세주의자나 인생무의미론자들의 가장 큰 위험은 까뮈의 출발점을 종착점으로 삼는 데에 있는 것이다.

흔히 ‘살아서 뭣해? 인생이란 그저 그런 것인데’라든가 ‘자살만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입버릇처럼 되풀이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지만, 원래가 이런 유형의 인간들은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 법이다. 이런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도 진짜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인간이 성찰에 의해서, 즉 이론이나 주의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는 지극히 희귀한 법이다. 키레나이의 헤게지아스는 자살을 가장 열렬히 찬미했거니와 그의 많은 제자들이 그의 학설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에 자살에 대한 교수를 금지당하기까지 했지만 그 자신은 자살하지 않았다. 또한 염세주의철학의 화신이라 할 쇼펜하우어도 알뜰히 장식된 책상 앞에 앉아 인생의 무의미함을 논하면서도 많은 일을 하며 오랫동안 살다 병사病死로써 생을 마쳤던 것이다.

오히려 자살자를 자살로 이끄는 것은 대부분 구체적 삶에서 야기되는 사건인 수가 많다. 흔히 실연이나 불치의 병, 또는 생활고로 인한 자살보도가 신문에 자주 나기도 하지만, 설사 이들이 인생에 대한 성찰에 의해 자살의 결론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상기한 구체적 이유-삶을 저해하는 결정적 요인이 없었던들 틀림없이 그들은 계속 살아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론은 삶을 능가할 수 없을 것이고 생명은 정녕코 주의主義보다 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살아보지 않은 자만이 회색이론을 늘어놓으며 잘못된 우월감이 빠져 있는 법이다. 두뇌 속의 절망과 심정이 당하는 절망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는 걸 그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진정으로 절망해서 이 삶을 거역하려고 했을 때 삶에의 애착이 얼마나 가슴을 태웠던가를, 절망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리라. 그대가 생명을 거역하고자 했을 때만큼 생명이 끈질기게 달라붙은 때가 있었던가?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는 법’이니 이거야말로 삶의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인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기 전에 삶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니, 젊은 그대들이여, 왜 사느냐를 묻기 전에 어떻게 살까를 탐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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