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김훈 저 | 생각의나무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의 개정판으로 김훈이 ‘한미한 초야에서 때때로 생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썼던 토막글’을 모아 낸 산문집이다. 현역 판정을 받은 후 부모에게 평발을 내밀며 ‘재심’받을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아들에게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라’며,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며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p.20)고 말하는 사람이 김훈이다. ‘본래 시국과 관련된 정치적 언어를 입에 담기를 좋아하지 않는’(p.87) 그이지만, ‘파렴치한 권력투쟁’에 분노하느라 문장을 쏟아냈고, 조국 산천(山川)을 노래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썼다. 여자와 아줌마에 대해 말하면서 그의 마초기질을 보여주기도 하고, 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하기도 한 그의 글을 읽자면, 그가 참으로 옳은 말만 하는 것 같다가도, 잘 생각해보면 그가 그렇게 썼기 때문에 옳게 보인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며칠 전 그의 소설 "흑산"이 출간되었다고 하니 또 사서 읽어야겠다.
책 속 구절:
이 판국에 술이 약해 보이는 여성 국회의원이 제 맘에 안 드는 신문칼럼을 쓴 소설가를 향해 “지식인이라면 어느 편인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삿대질을 했다고 한다. 나는 경악했다. 어느 편인지를 밝히라니!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이 나의 지성일 수가 있는가. 당신들은 또 어느 편인가. 나는 이른바 언론의 ‘자유’의 편인가. 나는 이른바 조세의 ‘정의’의 편인가. 내가 ‘자유’의 편이라면 ‘정의’를 배반하는 것이고 내가 ‘정의’의 편이라면 ‘자유’를 부정하는 것인가. 이러니 어느 편인가를 밝히라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잠꼬대인가 술주정인가. 언어는 더 이상 인간의 말이 아니다. 아무런 의미도 담겨져 있지 않은 음향처럼 들린다. 지옥의 모습은 본래 이러하다. (p.88~89 ‘개수작’을 그만두라)
이 판국에 술이 약해 보이는 여성 국회의원이 제 맘에 안 드는 신문칼럼을 쓴 소설가를 향해 “지식인이라면 어느 편인지를 분명히 밝히라”고 삿대질을 했다고 한다. 나는 경악했다. 어느 편인지를 밝히라니!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이 나의 지성일 수가 있는가. 당신들은 또 어느 편인가. 나는 이른바 언론의 ‘자유’의 편인가. 나는 이른바 조세의 ‘정의’의 편인가. 내가 ‘자유’의 편이라면 ‘정의’를 배반하는 것이고 내가 ‘정의’의 편이라면 ‘자유’를 부정하는 것인가. 이러니 어느 편인가를 밝히라는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잠꼬대인가 술주정인가. 언어는 더 이상 인간의 말이 아니다. 아무런 의미도 담겨져 있지 않은 음향처럼 들린다. 지옥의 모습은 본래 이러하다. (p.88~89 ‘개수작’을 그만두라)
설이 지나서 나는 쉰네 살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죽음을 내 실존의 불가피한 귀결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직도 덜 살아서 그런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생명의 일회성을 감당해낼 만한 마음의 힘이 없다. 인연이나 업장의 소멸이 무섭고, 불구덩이나 흙구덩이도 무섭지만 그 무서움을 인식하는 나 자신이 이미 증발해버려서, 무서움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그 대책 없는 적막은 더욱 무섭다. 내가 고백할 수 있는 삶의 인식이란, 삶은 살아 있는 동안의 느낌의 총화일 뿐이라는 정도다. 비천한 생사관일 테지만, 그 너머를 말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몸의 실존을 배반하는 거짓이라 하더라도 죽음의 적막에 비하면 그래도 내용이 있지 싶다.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죽어야 한다는 보편적 종말이 나의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죽음을 위로할 수는 없다. 대체로 유가(儒家)들은 살아 있는 자의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인문화할 뿐, 죽음 자체의 운명이나 그 너머를 입에 담지 않는다. 죽음은 살아 있는 인간의 언어와 사유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불가피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상종할 수가 없고 죽음에 관하여 말할 수 없다. 나는 다만 그 설명되지 않는 죽음이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을 끝없이 긴장시키고, 운명 앞에서의 경건성이 삶 속에서 작동되기를 바랄 뿐이다.
(p.134~135 대문 밖의 황천)
나는 아직도 죽음을 내 실존의 불가피한 귀결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직도 덜 살아서 그런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생명의 일회성을 감당해낼 만한 마음의 힘이 없다. 인연이나 업장의 소멸이 무섭고, 불구덩이나 흙구덩이도 무섭지만 그 무서움을 인식하는 나 자신이 이미 증발해버려서, 무서움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그 대책 없는 적막은 더욱 무섭다. 내가 고백할 수 있는 삶의 인식이란, 삶은 살아 있는 동안의 느낌의 총화일 뿐이라는 정도다. 비천한 생사관일 테지만, 그 너머를 말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몸의 실존을 배반하는 거짓이라 하더라도 죽음의 적막에 비하면 그래도 내용이 있지 싶다.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죽어야 한다는 보편적 종말이 나의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죽음을 위로할 수는 없다. 대체로 유가(儒家)들은 살아 있는 자의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인문화할 뿐, 죽음 자체의 운명이나 그 너머를 입에 담지 않는다. 죽음은 살아 있는 인간의 언어와 사유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불가피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상종할 수가 없고 죽음에 관하여 말할 수 없다. 나는 다만 그 설명되지 않는 죽음이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을 끝없이 긴장시키고, 운명 앞에서의 경건성이 삶 속에서 작동되기를 바랄 뿐이다.
(p.134~135 대문 밖의 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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