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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여행책

26일간의 여행스케치

by mariannne 2002. 3. 12.

26일간의 여행스케치 :
유럽배낭여행기 (김미진 저/그림 | 열림원)

유럽 여행기라면 뭐든 즐겁게 읽는 나로서는 이 책이 한없이 반가왔다. 최근 대형서점 진열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서는, 나온지 몇 년이나 된 책을 왜 몰랐을까... 의아했다. 출판사에서는 왜 '작가 김미진'이라는 이름을 이다지도 죽여놓았을까?

그녀의 소설을 오래 전에 두 권쯤 읽은 기억이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그래도 소설가가 쓴 유럽 여행기라니, 뭔가 좀 다를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게다가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는 작가의 스케치까지 담겨 있다니! 잔뜩 기대를 하고 단숨에 책을 읽어내렸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힘이 쪽 빠져버린 30대(?) 여성의 조용하고 담담한 유럽 여행기라고나 할까. 이전에 읽었던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의 유럽 여행기와는 느낌이 달랐다. 좌충우돌, 시끌벅적한 여행기는 아니라는 말씀. 동반자도 없고, 우연히 만난 친구에 대한 얘기도 없다. 대단하거나 쫀쫀한 정보도 없다. 하지만 유럽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은 상당히 정겹고, 문체 역시 마음에 든다.

작가는 '미술관'에 초점을 맞추어 여행을 한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암만 설명을 해도 직접 그림을 못 본 다음에야, 어떤 화가인지, 어떤 느낌인지 상상하기 곤란하다는 것. 이전에 읽은 최영미의 '시대의 우울'에 비교하자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작가가 직접 그린 스케치는 너무 쓸쓸하고, 유럽 여행의 이미지와는 더욱 멀어졌다. 시종일관 콧물감기에, 울렁증, 고산증, 몸살, 기침으로 아파하는 작가의 글은 더욱 우울했다. 그녀의 소설들 역시 그랬던가...

더 많은 양의 글을 써 냈다면 독자로서는 더욱 즐거웠을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책 속 구절 :
그 어느 정치가가 이처럼 많은 인파를 한 도시에 불러모으고, 일요일 아침부터 그토록 먼길을 걸어가게 할 수 있겠는가. 그건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 그리고 피카소 같은 불멸의 예술가들에게만 부여된 권능인 것이다. 파리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은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미술관 중에서 가장 유쾌한 장소일 것이다. 그의 유아적인 상상력과 치기 어린 장난, 고도로 농축된 예술가적 기질을 엿볼 수 있다. 피카소는 스페인 태생이고 거기서 청소년까지 보냈지만, 결국 피카소를 키워내고 불멸의 빛으로 타오르게 한 곳은 파리다. 파리의 하늘에는 수많은 '예술가의 별'이 떠 있다. 파리는 바로 이 별들의 자존심인 것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감미롭게 빛나는 파리. 그 이미지를 좇아 사람들은 매년 파리행 티켓을 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 피카소 같은 예술가가 없는 것일까. 왜 서울은 끔찍한 대도시로서의 이미지만 키워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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