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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비소설

예수전

by mariannne 2012. 10. 31.

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얼마나 가볍게 불리워지고 있나. 개신교는 '예수' 이름을 빌려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고, 개신교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뭐든 저지른 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진다. 그로 인해 그 이름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해졌는지 모른다.  저자는 '예수를 각자의 세속적 욕망을 신에게 청탁하는 매우 유능한 중계인쯤'으로 알고 있는 있는 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이 책을 쓰고 싶어했다. 그리고 '김규항의 견해'가 아니라,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기 위해 '강독' 형식을 채택하여 집필했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김규항의 견해'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은 마태오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구절씩 적고, 그에 대한 강론을 펼치는데, 기존에 알고 있던 예수를 좀 다른 시각에서 설명한다. 그건 성서를 보는 많은 견해 중 하나인 '김규항의 견해'다. 

[...] 예수는 우리에게 올바로 살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수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삶을 즐기라고 더 많이 행복하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실은 인생의 진짜 즐거움과 진짜 행복을 좇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예수의 별명은 '먹고 마시길 즐기는 자'였다. (p.11)

[...] 하느님은 권위가 가득 찬 왕처럼 근엄한 얼굴로 성전 지성소에 거하며 비천한 인민들과 직접 만나길 거부하는 분이 아니라 늘 인민의 삶 속에 함께하며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분이라는 것이다. (p.44)

저자에 따르면 예수는 현실을 변화시키려 했고, 예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 취급 못 받는 '인민들'이었으며, 예수의 변혁은 '당연히 정치적인 변혁을 포함'한 것이다. 저자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누구보다 왼쪽에 있는 사람이니 당연하다. 저자는 또 예수가 '계급적 관점'을 가졌으며, 예수에게 해방은 '인권을 잃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민들의 삶이 변화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개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고, 오히려 '사회주의'의 기본 정신이야말로 예수의 이웃 사랑에 닿아 있다고도 한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다른 몇 가지 사실도 전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덕분에 형벌을 면한 강도 바라빠(바라바)가 사실은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 무장 항쟁을 벌이던 조직의 성원이라는 것이다. 또, 예수의 부활을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예수의 제자로서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인물이며, 기독교에서 악의적으로 여성 인물을 배제시키려는 노력으로 억울하게 창녀로 둔갑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책에서 바리사인들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도 흥미롭다.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사인들을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그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이며, '오늘 윤리적이며 정의감에 넘치는 시민운동가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p.48)이라고 했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예수는 바리사인을 '위선자들'이라 꾸짖었고,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 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오늘날의 바리사인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안정된, 그러나 거부감이 들 만큼은 아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과 짐짓 긴장과 갈등을 벌이며, 늘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만 하는 대다수 인민들과는 달리 시민으로서 양식을 충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이따고 자부한다. [...]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 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상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p.118~119)

말하자면 이런 것 아닌가. 재벌을 욕하지만, 사실은 재벌이 되고 싶은 사람들. 양심적인 시민들이지만 인민과 구별되는 세력이고, 대놓고 악하지 않아 더 나쁜,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이다. 김규항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이런 지적 때문이다. 대부분이 '인민'인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이런 바리사인 아닌가?

김규항의 예수전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려고 한 혁명가' 예수에 대한 것이고, 이건 '하나의 견해'로 받아들이고 싶다. 신학자도, 성직자도 아니지만 가장 아래쪽에서, 가장 왼쪽에서 사회 변혁을 B급좌파 김규항의 견해로 말이다.


책 속 구절 :
[...] 예수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앙은 '하느님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 즉 '하느님이 진행하는 역사에 인간이 참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은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의 성실과 충성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실 속에서 하느님이 벌이고 있는 역사, 즉 하느님 나라 운동에의 참여인 것이다.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와 교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제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p.68)

보수 교회에선 이런 사실을 엄격하게 부인하는 것을 마치 하느님을 타협 없이 섬기는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태도는 실은 하느님을 자신들의 교회 체제에 가두어 놓으려는 말도 안 되는 수작일 뿐이다. [...] 어떻게 하느님의 생각을 전하면서 그리 오만하고 권위에 찬 태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p.69)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은 되지도 않는 논리로 제 탐욕과 이기심을 드러내며 자본주의를 찬미하는 막돼 먹은,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서 반감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서 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 그러나 절대 자본주의가 극복되길 바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그들이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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