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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사회·정치·역사

생각의 좌표

by mariannne 2014. 5. 25.

 


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은이) | 한겨레출판 | 2009-11-24


 

한때 “파리의 택시 운전사”로 유명세를 치른 홍세화 씨는 20여 년의 프랑스 망명생활을 정리하고 2002년 영구 귀국하여 한겨레 기획위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 진보신당(2014년 5월 현재 노동당) 대표를 지냈다. 지금은 노동당 소속이며, 격월간지 “말과 활”의 발행인이다.


이 책은 그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 강연 원고 등을 정리하고 새 글을 보태 2009년에 내 놓은 것이다. 제목처럼 ‘생각의 좌표’를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라는 물음에,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며 ‘사유하는 인간’으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펴낸 것이다.


‘내가 가진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저자는 1) 폭 넓은 독서 2) 열린 자세의 토론 3) 직접 견문 4) 성찰의 네 가지를 꼽는다. 그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청소년기를 거치며 받는 교육 경험에 비추어 얼마나 많은 독서, 토론, 견문, 성찰기회를 갖게 될까? 그렇게 형성된 내 ‘생각’은 제대로 된 것일까?, 하는 것으로 책이 시작된다.

 

왜 우리는 만점이 100점일까? 다른 나라들처럼 20점이나 10점이 아니고? 점수 폭이 넓어야 학생들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기 쉽기 때문이다. 유럽의 학생들은 가령 12점(20점 만점) 이상을 받으면 그 시험 영역에서 벗어나 다른 일을 한다. 대학은 평준화되어 있고, 고등학교까지 학생들에게 석차나 등급을 주지 않고 합격/불합격 기준으로 절대평가만 하기 때문이다. 10점이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점수이므로 12점 이상의 점수를 받은 학생은 그 시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 […] 12점 이상을 받은 학생은 그래서 책을 읽고 토론하고 연애하고 여행하고 자연과 벗한다. 그 과정에서 자기 적성을 발견할 수 있고 적성에 맞아 흥미를 느끼는 교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 ‘선택과 집중’이 가능하다.

우리 학생들은 88점이 아니라 99점, 심지어 100점을 받아도 그 시험 영역을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한다. 한 등수라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1등을 하고 1등을 끝까지 지킬 때까지. 모든 학생이 모든 과목의 모든 시험 영역에서 끝까지 해방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

다른 나라 학생들이 책과 토론과 여행으로 사회와 다양한 방식으로 만날 때 우리 학생들은 오로지 시험 문제지만 만난다. 상상력이나 창조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인간과 사회와 만나지 않은 채 오로지 시험 문제지와 만나려고 공부하고 또 공부할 뿐인데? 그런데 도대체 무얼 공부할까? (p.32~33)

“내 생각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이 사회로 눈을 돌려 생각을 넓히면 “회색의 물신 사회”가 보인다.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살다 보면 외면하거나 체념하게 되는 게 사회 부조리다. 탐욕에, 몰상식, 개념 없는 언어가 난무하지만, 분노의 화살은 제대로 과녁에 꽂히는 법이 없어 보인다. 이젠 ‘미개하다’라는 말의 정의가 바뀌게 될 지경이다. 


오래전 성남으로, 경기도 광주로 이주당한 사람들의 처지를 간단히 외면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미끈하게 들어선 아파트였다. 낙엽이 구르는 것만 보아도 천진난만하게 웃을 나이에 점수가 낮다는 이유로 죽음을 택하지만, 그 죽음은 경쟁력 제고를 위해 평준화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만큼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라고 되뇌며 모두들 자신의 3등 인생을 위무한다. 농민이 제 몸에 기름을 붓고, 부모와 조부모가 있는 아이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이 홀로 개에 물려 죽는다. 인분 사건, 총기 난사 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했지만 한 사병이 또 어이없이 죽는다. 도시에서 껍데기가 벗겨져 나간 하얀 쌀알에 남아 있을 농약을 걱정하는 중에도 농약을 뒤집어쓴 채 논밭을 일구던 농민들이 여의도에 눕는다. 도시의 ‘나’들은 통상이니 경제적 효용성이니 낯선 단어로 더하고 빼며 타당성을 따지고 합리적 판단을 말한다. 농촌이 ‘나’를 죽음으로 이끈 절망은 도시의 ‘나’들의 무관심이다. 그렇게 농촌은 패배했고, 우리는 모두 근본에서 패배했다.

모든 나들이 ‘나’만의 행운을 위해 ‘우리’ 모두의 행복을 짓밟으며 살고 있다는 충고는 판도라의 상자에 애당초 희망이 들어 있지 않다는 악담이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끝내 죽더라도 싸우다 지쳐 시어질 때까지는 살아내야 한다. (p.118~119)


 

홍세화 씨는 내가 글을 쓸 때 생각하는 롤모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글은 허투루 쓴 문장이 없고, 쓴 내용이 진심이라는 게 느껴진다. 마음에 없는 칭송을 하지 않고, 괜히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다. 일부러 꾸미지도 않고, 쓸데없이 공격하는 법도 없다. 그의 책 중에 괜히 읽었다 싶은 게 있었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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