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지나가다 (이용재 지음 | 이미지박스 | 2010-07-01)
이 책을 빨리 다 읽어버리는 게 아까워서 야금 야금 읽고 싶었다. 영화 '하하하'를 보며, 통영의 여행, 그 일탈같은 일상이 조금 더 연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조금 더, 조금 더 글이 연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저자는 식탐과 책탐을 가진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서 건축 공부를 한 후 그곳에서 취직하고, 다른 사람과 비슷한_분노와 억울함과 노동의 신성함과 동료애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동시다발로 느끼는_직장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혼자 코미디 영화를 보거나 서점을 가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종종 글을 썼다. 감수성이 뛰어나고 연약한 사람인 듯 싶었는데, 체중이 세 자리 숫자를 넘은 적이 있다는 말에 흠칫 했다가, 다이어트를 하고, 운동을 하며 조심한다는 말에 다시금 예민한 한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가 공을 들여 쓴 이 이야기는 직장에서 정리해고 된 후 단골 중국집의 '오렌지 비프'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간의 미국에서의 일상을 떠올리고, 60일 후 귀국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숙취에 시달리며 비행기를 탄 직후 '두레박의 도움 없이도 위액을 부지런히 길어 올렸다'는 표현이나 느려터진 항공사 직원의 서비스에 '그들마저도 굼벵이가 운영하는 직업훈련원 출신인지,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동물로 알려진 나무늘보마저 기다리다가 울화통을 터뜨리며 다 쏴 죽여버리겠다고 총을 들고 설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느렸다'는 표현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책 속 구절 :
저녁을 차려 먹고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노라면 일요일이 슬금슬금 월요일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게 느껴졌다. 슬금슬금 물러나는 일요일에 반해 월요일은 성큼성큼, 새로 다가오는 지루함의 시간에 언제나 덤처럼 딸려오는 두려움을 한 아름 가득 들고 다가왔다. 어째 새로운 일상이라는 말이 지독한 모순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너무나도 찬란한 슬픔'이 '침묵의 웅변'을 하는 시간, '새로운 일상.' (p.116, 일요일, 늦은 오후의 서점 나들이)
내가 오는 걸 알고 있었는지 눈은 내가 발을 채 디디기도 전에 잔뜩 땅으로 찾아와 쌓여 있었을 뿐, 머무르는 내내 새로 찾아오지 않았다. 거리를 쏘다니다가 라면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 겉으로 보이게는 멀쩡하지만 그래서 속으로 더 외로울지도 모르는 아저씨가 로비의 컴퓨터로 옷을 추워 보이도록 덜 입은 소녀들의 사진이 넘쳐나는 웹 페이지를 뒤지는 것을 멍하니 구경하다가 자판기에서 캔맥주를 뽑아 마시고, 다시 밖으로 나가 백화점 지하 식당가에서 마감 직전 떨이로 파는 고로케와 케이크, 푸딩 따위를 잔뜩 하다가 방 창문을 가능한 한 활짝 젖혀 열어놓고 좀 전에 마셨던 캔 맥주 회사의 반짝반짝 빛나는 네온사인을 바라보면서 먹고 또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세 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다른 바닷가 마을을 찾아가 중국인 관광객들 틈바구니에 섞여 장작불에 구워 파는 조개 관자를 먹고, 산꼭대기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낮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울부짖는 듯한 바람의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와 바둑판 형태로 잘 계획한 거리를 시린 발로 걷다가, 전망대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다시 돌아와 또 잠이 들었다가 "오겡키데스카"라는 대사가 유명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마을을 찾아가 "오겡키데스카"는 외치지 않고 빵집에서 곰보빵만 먹고 돌아와서는 지쳐 잠들 때까지도, 눈은 새로 찾아오지 않았다. 드디어 짐을 다 챙기고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를 걷는 동안, 싸락눈이 참으로 치사하게도 5분 동안 내렸다. (p. 211~213, 겨울의 복도와 치사한 싸락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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