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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외딴방

by mariannne 2009. 6. 7.


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일주일 내내 아침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며, 출근해서 구내 식당에서 혼자 아침밥을 먹으며 이 책을 읽었다. 밥을 먹다가 울컥하거나 가슴이 탁 막히기를 여러번 반복하며 다 읽었고, 새삼 작가 신경숙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져 찾아보고 싶어졌다. 15년도 넘었겠지만, "풍경이 있던 자리"를 읽은 후 신경숙의 작품은 왠지 손이 가지 않았고, 그 동안 단 한 권도 읽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아는 친구가 "외딴방'을 선물했고, 10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을 이제사 읽은 것이다. 며칠 전에는 프랑스에서 비평가와 기자들이 제정한 '주목받지 못한 작품상'(Prix de l'Inapercu)을 수상했다는 이 유명한 책.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공단에서 일한 작가 개인의 과거를 그대로 적어 내려간 자서전적 소설이다. 당시 시대상을 생각한다면 개인의 삶을 넘어 선 시대적 메시지가 포함 된 글이기도 하고.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숙연한 마음을 갖게 만드는 소설이다. 

책 속 구절 :
지금도 나는 자연 앞에 서면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진다는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내게 있어 자연이란 얼마간은 피로하고 얼마간은 무서운 것이다. 나는 자연을 내 피부 바로 밑에서 배웠다. 감자를 캐려고 땅을 파면 지렁이가 나왔고 밤나무에 기어올라가려다 보면 쐐기가 쏘았다. 잡목은 팔을 찔렀고 계곡물 골짜기는 내 발바닥을 미끄러뜨렸다. 동굴이나 묘지 위 같은 데는 마음에 들었으나 동굴 속에 들어가면 박쥐가 험악하게 날개를 폈고 묘지 위에 오래 누워 있으면 햇볕에 그을려 얼굴이 쓰라렸다. 그래도 내겐 길거리나 집보다는 자연 속에 놓여 있을 때가 좋았다. 집보다는 자연 속에 놓여 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p.56)

내가 작가라는 걸 알게 된 식당 아줌마는 내게 딱 두 가지만 묻겠다고 했다. 딱 두 가지만, 이라는 말에 내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말이길래 딱 두 가지만, 이라는 단서를 붙이는지.
"한 가지는요......"
식당 아줌마가 물어본 딱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는 내가 어느 수준의 글을 쓰느냐는 것이었다. 어느 수준이라니? 잘 납득이 안 가서 내가 무슨 말인지......? 하고 되묻자, 식당 아줌마는 고갤 갸웃하더니 다시 성심껏 말을 했다.
"그러니까요. 내가 책을 딱 한 번 선물받은 적이 있었어요. 친척이 선물을 해주었는데, 내가 산 책도 아니고 해서 어떻게든 다 읽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읽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더라구요. 그 책을 선물받은 지가 사 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다 못 읽었어요. 아무래도 유식한 사람들이 읽는 책은 따로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거기는 어떤 수준으로 쓰는가 싶어서요. 나 같은 사람도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을 쓰는지, 아니면 수준 높은 글을 쓰는지, 그게 궁금해서요?" (p.75)

"어디서 굴러먹다 온 말뼈다귀야. 여기는 생산현장이야. 생산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 관할이라고. 어디다 대고 이래라저래라 하는거야."
유채옥도 생산과장과 똑같은 어투로 외친다. 우리가 기계인가? 왜 우리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가? 닷새 동안 계속 이어지는 잔업에 코피가 터져 집으로 돌아간 미스 최에게 사직서를 쓰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유채옥은 계속 외친다.
"우리의 권익을 위해 노동법에 따라 결정한 노조다. 회사에서 아무리 방해를 해도 우리는 결성식을 갖겠다."
생산과장과 유채옥의 삿대질이 오가는 싸움에 미스 최가 운다. 생산과장 대신 총무과장이 달려와 유채옥에게 배은망덕한 년, 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유채옥은 총무과장을 쏘아본다.
"당신에게 나, 은혜입은 거 없어!" (p.77)

노조지부장, 그가 한 말들을 기억한다. 나는 여러분들이 야근하는 시간에 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방에 딸린 욕실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 목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깨닫게 하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희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을 귀히 여겨 권리를 찾아가기를 바랐습니다. 노조지부장, 그는 우리들의 침묵이 안타깝다. 권리를 주장할 줄 모르는 우리들. 그보다는 잔업이나 특근이 없어져서 수당을 못 받게 될까 봐 그것이 걱정인 우리들. 우리는 스스로를 귀히 여길 줄을 모른다. 우리는 그의 말처럼 희생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p.255)

"우선 대충 내가 입시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을 사왔다. 수학이니 영어는 아예 시작하지도 말고 암기과목 위주로 해라."
큰 오빠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준다.
"선택과목은 가정으로 해라. 가정책은 뭘 사야 할지를 몰라서 못 샀다. 학교 앞 서점에 가면 주간 입시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문제집을 사도록 해."
열아홉의 나, 그만 놀라서 수저를 내려놓고 큰 오빠를 빤히 쳐다본다. 입 속에 든 밥을 씹지도 않고 그냥 꿀꺽 삼킨다.
"늦었지만 열심히 하면 전문대학이라도 갈 수 있을 거다."
큰 오빠의 목소리가 물줄기 같다. 어디선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꽃이 갑자기 화르르 피어나는 것 같다.
"밥 먹자."
오빠가 밥상 위에 놓인 시금치나물에 젓가락을 갖다댄다.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를 큰 오빠가 빤히 쳐다본다.
"왜 그러냐?"
열 아홉의 나,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오빠 앞으로 당겨앉는다.
"오빠!"
오빠가 밥을 떠먹다 말고 다가앉는 열아홉의 나를 쳐다본다.
"정말이야?"
"뭐가?"
"정말로 나, 공부해도 돼?"
"응."
"정말로?"
"응."
큰오빠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또 힙겹게 웃는다.  (p.357~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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