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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혀 - 조경란 소설

by mariannne 2009. 5. 10.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젊고 아름다운 전직 모델과 사랑에 빠져 떠나가버린 남자에 연연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 그녀는 쿠킹 클래스 강사이자 레스토랑 '노베'의 요리사인 정지원이다. 떠나간 건 그 남자의 마음인데, 그 마음이 옮겨진 젊고 아름다운 모델에게 복수를 감행하는, 예측가능한 '의외의' 결말. 주인공은 요리사지만, 작가의 전직을 의심하자면 '요리사'보다는 '푸드 코디네이터'에 가깝고, "다 읽고 나면 입에 군침이 돌게 하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은 오히려 '맛있는' 요리보다 눈을 현혹시키는 '멋있는' 요리의 여운만 남긴다. 거식증인 여자와 비만인 여자, 여자 때문에 상처받은 남자, 남자 때문에 상처받다 못해 정신이 돌아버린 여자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작가의 노련함이 돋보이지만 시종일관 펼쳐지는 그 '연연함'때문에 주인공이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 게 흠.

책 속 구절 :
가장 관능적인 냄새는 어린 까마귀에게 사십 일 동안 삶은 계란만 먹여서 죽인 후 그것을 도금양잎과 아몬드오일에 넣어 뽑은 정수의 냄새다. 모든 여자들이 갖고 싶어하며 남자들이 원하는 냄새. 사향은 이제 흔해빠지긴 했지만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황홀하게 느끼는 냄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여성이 껍질을 벗긴 사과를 겨드랑이에 끼워두었다가 땀에 흠뻑 젖으면 그걸 애인에게 줘 냄새를 맡게 했다. 냄새는 가장 오래 남는 기억이다. 사람들은 여기 잠시 머물다 가지만 냄새는 시간을 초월하는 법이다. 겨드랑이에 끼워두어 땀에 흠뻑 젖은 사과 냄새, 계란만 먹여 죽인 까마귀 냄새. 그 극치의 페로몬 향기처럼 나는 내 요리로 이 사람들의 미각을 지뢰처럼 폭발시키고 싶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비틀거리고 싶지 않다. (p.199)

미식가들의 음식에 대한 집착은 집요한 데가 있다. "거짓 배반"을 쓴 18세기 작가 니콜라 토마 바르트는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먹는 버릇이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그는 음식들을 다 보지 못하고 결국 다 먹지 못하게 될까봐 늘 두려워하며 내가 이것을 먹었느냐? 저것은 먹었느냐? 하며 끊임없이 아랫사람들을 다그치곤 했다. 그는 결국 소화불량으로 죽고 말았다. 소고기요리를 좋아했던 다리우스 대왕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휘장을 쳐놓곤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커피에 중독된 작가 발자크는 하루에 커피를 사오십 잔씩 마시다 위염으로 죽었다. [...]
음식에 대한 집착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는 '오터런'이란 금지된 새요리에 중독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일화다. 암으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 미테랑 대통령은 1995년 12월 31일 새해 전야 만찬을 위해 친구들을 초대했다. 이날 메인요리는 명금(鳴禽)으로 멸종 위기에 처해 식용으로는 금지된 '오터런' 요리였다. 순결과 예수의 사랑을 상징하는 이 새요리는 미식가들이 손꼽는 세계 최고의 요리로, 오븐에 구워 통째로 입속에 집어넣고 먹는다. 이 새요리를 먹는 방법도 따로 있다. 아주 뜨거울 때 혀 위에 올려놓고는 새의 지방이 목구멍을 타고 줄줄줄 떨어지는 쾌감을 즐기다가 식기 시작하면 새의 머리부터 뼈째 씹어먹기 시작하는데, 이 때 오터런 특유의 뼈가 씹히는 오도독오도독 소리가 리듬을 타듯 고막을 울린다는 것이다. 그날 밤 미테랑 대통령은 한 사람이 한 마리씩만 먹게 되어 있는 전통을 어기고 두 마리를 먹었다. 그 다음날부터 음식을 넘기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오터런요리가 그가 이 세상에서 맛본 최후의만찬이 되고 만 셈이다. (p.238~240)

7월 첫째 주 월요일에 드디어 육류를 이용한 새로운 레시피 한 장을 완성했다. 사람고기와 맛이 가장 비슷한 건 돼지고기라고 한다. 남태평양에 사는 식인종들은 그래서 사람을 '키 큰 돼지'라고 불렀다. 돼지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모든 부위가 맛이 좋다고 하지만 정작 혓바닥은 중세 말기에 돼지 검사를 담당했던 검사관들만 먹었다. 내가 사용한 건 소 혓바닥이다. 붉은 혀를 싸고 있는 흰 막과 힘줄, 목구멍에서 딸려온 근육을 제거하기 위해서 고기 다룰 때 쓰는 작고 날카로운 칼을 눈썹을 그릴 때처럼 짧게 짧게 끊어 정교하게 움직여가며 가운데 붉은 부분만 도려내었다. 칼은 쓰면 쓸수록 내 손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칼을 쥔 손이 칼이 되는 느낌, 손안으로 칼이 사라지는 느낌, 칼과 하나가 되는 느낌, 입속의 혀처럼 칼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느낌은 역시 고깃덩이를 손에 쥐고 있을 때 가장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그건 밀가루 반죽을 쥐고 있을 때나 찢어지기 쉬운 야채를 만지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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