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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비소설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by mariannne 2009. 12. 30.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이충걸 지음 | 위즈덤하우스)

작년 여름에 사 놓고 일 년 넘게 읽다 말다를 반복하며 절절매다가 하루 날잡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나에게는 버거운 현학적 표현과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엄청난 메타포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이충걸의 글은 일단 마음 잡고 읽기 시작하면 그 매력적인 문장에 빠져 헤어나오기 힘든 면도 갖고 있다.
이 책은 쇼핑에 관한 기록이자 트렌드와 브랜드, 패션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면서 취향과 스타일, 돈에 관한 고찰이기도 하다. 그는 소심한 고객이었다가 욕망의 화신이 되기도 하고, 트렌드의 최첨단에 서 있으면서 부자들의 천박함을 조롱하다가 그 부자들이 가진 돈 때문에 사고 싶은 물건 앞에서 망설이는 자신을 한탄한다.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엣지'있는 매거진 편집장의 화려한 글발이 부럽기만 하다.

책 속 구절 :
그래서 매일 쇼핑에 대한 새삼스러운 사실들을 배운다. 쇼핑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합리화라는 것부터, 내가 산 것들은 늘 분별과 후회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든다는 것, 때로 연애나 스포츠, 비즈니스보다 더 큰 힘으로 동기를 부여하거나 빼앗고, 자극하거나 낙담시키며, 정체성을 지탱하거나 제한한다는 것, 결국 시간처럼 차라리 삶 자체를 판단한다는 것까지. 하지만 나는 어떤 자기 성찰도 쇼핑 경험보다 못한다고 믿는 속물이라서 지갑을 열 수밖에 없다. 사고 싶은 걸 안 사면 내 돈이 외로워할까봐. (p.6)

"내가 낼게."
진심은 아니었다. 오렌지 카운티의 재산가는 오버랩으로 내 말을 받았다. 한국에 와서 얻어먹긴 처음이네요. 삽질하네. 내 마음이 나쁜 말을 뱉었다. 하지만, 왜 처음 본 이들 것까지 내가 내야 할까. 고작 두세 살 어릴 뿐이고, 듣자 하니 내 스무 배쯤 되는 재산가들이 어떻게 '얻어먹는' 것에 그렇게 당당할까. 그런데도 내가 계산하는 게 내 나이 남자에게 옳은 행동양식일까. 나는 계산서를 낚아채며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아니고, 화장실 가는 척 계산하고 나선 절대 알리지 말라는 이순신도 아닌데. 차라리 그들이 카드밖에 없어 못 낸다고 하면 저기 지하철역에 현금자동지급기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지갑을 털린 채 차에 타자 주유 경고등이 서글프게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계산하는 순간, 상대와 코드를 맞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적당한 지불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러나 순수하게 배양해왔던 내 금전 감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참 잦다. 언제나 연장자가 지불해야 한다고 '믿는' 것부터, 여자와 함께한 식사값은 남자가 내야 '마땅한' 것까지. (p.58)

여자들은 거짓말을 날조한다. 그러나 남자들은 아예 새로운 공장 하나를 짓는다. 쇼핑에서도 똑같다. 아내가 남편에게 셔츠 하나가 10만 원이라고 말하면 실제론 20만 원짜리일 수 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에게 셔츠가 10만 원이라고 말한다면 가격도 정말 10만 원이다. 그러나 그게, 실은, 아내 아닌 다른 여자가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며, 그건 또 자신이 전에 그녀에게 사주었던 소나타에 대한 감사의 표시란 사실은 생략해버린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선 그렇게 단위가 큰 남편이, 아끼고 아끼다가 겨우 뭔가 사자고 드는 아내에겐 꼭 묻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꼭 필요해? 집에 똑같은 건 없어?"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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