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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비소설

불쏘시개

by mariannne 2008. 3. 31.

불쏘시개 | 원제 Les Combustibles  (아멜리 노통브 지음 | 열린책들)

'어떤 책을 가장 먼저 태울것인가'의 문제

전쟁이 일어나고, 고립된 방 안은 냉기로 가득찼다. '책이 한 가득 꽂혀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서가'와 나무 의자, 무쇠 난로만 남아있고, 세 명의 등장인물이 무대를 오간다. 침대와 책상, 안락 의자는 모두 불쏘시개로 사용했고, 이제 남은 땔감이라곤 냉기를 달래줄 의자와 벽면을 채우고 있는 책들. '무인도에 어떤 책을 가져갈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책을 가장 먼저 태울 것인가'의 문제가 남았다. 이 책은 '가장 아멜리답지 않은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그녀의 소설은 대화 투성이고, 이 희곡 역시 마찬가지. 다른 몇몇 소설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대화들이 오간다. 전쟁통에 '책'이 뭐 그리 중요할까. 이 희곡은 '책'에 대한 작가의 애착과 성찰을 보여줄 뿐이다. 희곡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1994년에 발표한 작품이라니, 그녀나이 스물 여덟. 부러울 따름이다.

책 속 구절 :
마리나 물론이죠.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희망에 가득 찬 멋진 메시지에요. 그러나 그 희망의 멋진 메시지로도 내가 따뜻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해요.
교수 그러니까, 마리나, 문학의 목적은 그대를 따뜻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네.
마리나 아, 그래요? (그녀는 화가 나서 책을 바닥에 던진다.) 어쨌든 저는 문학 따위에는 관심 없어요.
교수 형편없이 어리고 못난 학생이군.
마리나 (상냥하게) 제가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겪지만, 문학이 무엇을 해줄 수 있죠? 아무것도 없잖아요. 왜 문학 따위를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교수 마리나, 자넨 진짜 추위에 떠는 가련한 짐승이 됐군.
마리나 그래요. 저는 짐승 같은 삶을 살고 있어요.
교수 짐승도 영원히 살지는 않아. 유한한 존재야. 하지만 이 책은 영원해. 만일 책을 불태운다면, 불꽃은 겨우 2분 정도 살아 있을
뿐이네.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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