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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남한산성

by mariannne 2007. 8. 12.


남한산성
(김훈 저 ㅣ 학고재)

삼복더위에 병자호란의 매서운 바람을 읽는 느낌이 묘했다. 작가의 충분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추위가 팽팽하여 뼈마디가 얼어붙는 고통’이 먼 나라 얘기같을 정도의 무더위였다. ‘얼음의 힘이 빠지면서 얼었던 흙이 죽처럼 흘러내’릴 때가 되어서야, ‘구멍 언저리에서 냉이가 올라’올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실감이 나기 시작한 남한산성은 임금의 출성出城으로 마무리가 되며 그제서야 단순한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작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역사적 사건들을 자꾸 대입시키고, 옳고 그름을 따져보게 된다. 용기없는 수성守城은 늘 손해였다. 하지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당할지언정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 잘못 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가 없다. 임금 앞에 머리를 숙인 자들은 내내 여러 가지 시각과 의견을 내 놓았고, 그 어느 것도 확실히 옳다, 확실히 그르다를 말할 수 없을진대, 누가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역사의 판단 또한 보류중이다. 작가는 주화와 척화의 어떠한 단정적인 견해를 보여주지 않았고, 민초의 편을 들지도 않았다. 김상헌과 최명길의 말로末路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써 확인할 수 있지만, 병자호란이 되풀이 된다면 사람들은 또 천 가지, 만 가지의 의견을 말 할 것이다.

김 훈의 소설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그의 글솜씨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슬픔이 나를 옥죄는 동안, 서둘러 작은 이야기를 지어서 내 조국의 성에 바친다'는 서문 또한 마음에 든다. 당장 사서 읽는 것도 좋겠지만, 기왕이면 그 처절한 슬픔을 이해하기에 겨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다. 

책 속 구절 :
서문으로 들어온 청장 용골대의 문서는 나흘 만에 어전에 보고되었다. 문서가 서식을 갖추지 않아서 응답하는 일은 난감했다. 예조는 품고稟告를 반대했다. 법도도 없는 문서를 조정에 들일 수 없으며, 문서가 딱히 임금에게 오는 것이 아니므로 아뢸 수 없고, 보낸 자가 누구인지 명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응답할 필요도 없고, 무례한 문서로 어전을 더럽히고 성심을 다치게 할 수 없다고 김상헌은 말했다.
이조판서 최명길의 생각은 달랐다. 문서가 비록 무례하나 이적을 상대로 예를 논할 수 없으며, 임금을 향한 문서가 아니므로 임금에게 욕될 것이 없고, 보낸 자의 이름 석 자가 박혀 있지 않더라도 적진에서 성 안으로 들어온 문서임에 틀림 없으므로 글을 지어 응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땅히 주달해야 한다고 최명길은 말했다. (p.138~139)

아침에 김상헌은 서날쇠를 묘당에 천거했다. 품계 없는 대장장이에게 임금의 문서를 맡길 수 없으며, 서날쇠가 비록 노비의 신분은 면했으나 삼 대째 쇠를 두들기는 천골賤骨로서, 이미 제 처자식을 성 밖으로 내보냈으므로 믿을 수 없고, 또한 먼 지방의 군장들이 대장장이가 들고 온 문서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일었다. 문서를 맡겨 멀리 내보내려면 먼저 품계를 내려서 보내야 한다는 말과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 알 수 없으므로 돌아온 후에 품계를 내려야 한다는 말이 부딪쳤다. 또 돌아왔다 하더라도 격서를 전하고 왔는지 들판을 빈둥거리다가 왔는지 알 수 없으므로 구원병들이 당도할 때까지 가두어 놓아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p.230)

- 포개어 입은 자는 속까지 젖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 군병들 중에 포개어 입은 자가 있고 홑겹인 자가 따로 있느냐?
- 각자 제 요량으로 입고 있으니…….
- 포개어 입은들, 밤새 내려 땅속까지 적신 비가 옷에 스미지 않았겠느냐? 스몄으니 얼지 않았겠느냐? 경들의 계책을 말하라. 어찌하면 좋겠느냐?
영의정 김류는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를 돌려서 내행전 마당에 떨어지는 빗줄기를 힐끗거렸다. 김류가 시선을 마당에 꽂은 채 말했다.
- 눈이 왔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옵니다.
임금이 말했다.
- 비가 오는데 눈 얘기는 하지 마라. 어찌해야 좋겠는가?
병조판서 이성구가 말했다.
- 전하, 군병의 추위는 망극한 일이오나 온 산과 들에 비가 고루 내려 적병들 또한 깊이 젖고 얼었으니, 적세는 사납지 못할 것이옵니다.
임금은 눈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 그렇겠구나. 그래서 병판은 적의 추위로 내 군병의 언몸을 덥히겠느냐? 병판은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말라.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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