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소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by mariannne 2023. 2. 6.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저 | 해냄 | 2017년 03월 

베스트셀러 작가 공지영의 소설은 소재도, 문체도 무난하고 흥미로워 잘 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 개인의 전사(戰士)적 기질, 뭔지 모를 거북함 때문에 꺼려지기도 하고. 

이번 소설은 라디오 방송 광고에서 나오는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의 줄거리 때문에 궁금해서 읽게 됐다. 몇 달 전인 2017년 4월에 출간된 단편집이지만, 알고 보니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쓴 단편 중 다섯 편을 골라 낸 것이다. 그 중 세 편이 '작가 공지영' 자신이 주인공이다. 일부러 그런 걸 고른건지, 아니면 요즘 쓰는 단편들이 그런건지 모르겠다. 

* 나중에 생각나지 않을까봐 적어 놓는 줄거리 

월춘장구(越春裝具)
작가 공지영의 이야기. 글을 쓰기 위해 강원도, 해발 800미터에 있는 별장을 찾았지만, 세상은 이미 봄인데 그 곳은 겨울이다. 장을 보고 밥을 챙겨먹으려다 막내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서둘러 서울의 응급실로 가야했고, 아이는 다행히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겨울 길을 갈 때 장비가 필요하듯이, 봄 길, 꽃 길, 낯선 행복 길을 걸어갈 장비가, 월동 장구 말고, 월춘 장구...... 아마도 내게 그건 쓰기, 읽기, 웃기, 기도하기 아닐까"(p.42)라는 말로 글이 마무리된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강남의 유명한 사거리에 빌딩을 가지고 있는 집안의 열아홉 여자 고등학생이 지켜본 외할머니 이야기다. 암으로 사망선고를 받고 임종 직전이던 할머니 대신 그 곁을 지키던 막내외삼촌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30대의 돌연사다. 할머니는 갑자기 일어나 꼬들꼬들한 밥을 먹고, 갈비를 뜯었다. 얼마 뒤 다시 할머니가 앓아누우셨지만, 이번엔 파출부 아주머니가 죽었고, 할머니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큰 외숙모의 장례를 치렀고, 할머니는 다시 기운을 차린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소설의 화자인 여고생 손녀는 알고 있었다. 그 다음에 도둑고양이가, 어린 까치 몇 마리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50대의 기품있는 여성이, 태어나자마자 남의 집에 보내 생이별한 동생을 찾는다면서 작가 공지영을 찾아왔다. 5년 전에 작가가 "미안하지만 찾으시는 분이 나는 아닌 것 같다"며 연락을 피한 그 여자다. 어쩌다 다시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 여성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공지영을 설득했다. 공지영은 유전자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는 소설에 나오지 않는다.  

부활 무렵
90평 빌라에서 가정부 일을 하는 순례는, 여동생이 명품백 10여 개를 훔쳐 경찰서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동생에게 간다. 여동생 역시 가정부로 일하는 처지였고, 경찰서에는 동생이 일하는 집의 여주인도 와 있었다. 선처를 베풀어달라며 동생의 집주인에게 사정을 했지만, '배신감' 때문에 거절을 하던 주인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조건부 용서'를 한다. 그 조건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나와서 간증을 해달라는 것이다. 

맨발로 글목을 돌다 
작가 공지영이 주인공. 소설인지 수필인지 모를 글이지만, 2011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스물 두 살에 납북되어 이십 년 이상 북에서 살다 돌아온 일본인 H를 인터뷰하기 위해 일본에 간 이야기다. 


책 속 구절: 


버스에서 내린 두 자매는 딸기 바구니를 들고 걸었다. 고급 빌라 정도에 사는 줄 알았더니 뜻밖에도 찾아간 집은 39평 아파트였다. 39평 아파트 살면서 그 비싼 몇백만 원짜리 백을 그렇게나 많이 샀단 말인가 싶어져서 순례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 정도 비싼 가방이라면 요즘 순레가 일을 다니는 90평짜리 빌라의 안주인 정도가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얘, 니네 주인 39평 살아도 돈은 엄청 많은가 보다?"
순례는 혹시나 하고 물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남편 몰래 가방을 사들인 모양이야. 이번에 나 때문에 들통이 나서 이혼한다 어쩐다 난리도 아니었던 모양인데, 알고 보니 카드 빚이 몇천이래."
"저 여자는 많이 가졌는데 너는 아니어서 억울하다고 울고불고했잖아?"
"글쎄...... 그 비싼 걸 자꾸 사들이니 돈이 엄청 많은 줄 알았지 뭐야."
순례는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그게 빚이었다니 말이 되니? 그런데 가방은 왜 그렇게 사들였대?"
"몰라, 친한 친구가 부자래. 그 친구 따라댕기며 막 샀다는데......."
"그년도 너만큼 미친년이구나."
동생에게 다시 화살을 쏘면서 순례는 갑자기 억울해졌다. 막상 정례가 풀려나고 나자 괜히 구걸했나 싶어진 것이다. 겨우 39평짜리 살면서 그 위세를 부리다니, 빚 얻어 가방 산 년인지 모르고 하늘에서 떨어진 선녀라도 되는 듯 떠받들어주다니, 너도 불쌍한 인생이구나 싶어졌지만 집으로 들어서자 순례는 머리 숙여 공손히 절을 했다. (p.147~149, "부활 무렵")


밤새 마음이 지쳐서 어둠에조차 위안을 받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맞이해햐 하는 그런 아침이 있다. 그렇게 육체를 데리고 있기 힘들었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일어나 습관처럼 촛불을 켜놓고 십자가 앞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시편」으로 이루어진 기도를 바치려고 책을 폈다. 그런데 그날의 「시편」의 첫 구절을 보는 순간 언어들이 화염처럼 내게 쏟아졌다. 
지나온 상처마다 악취가 가득하오니, 내 어리석은 탓이오이다. 
이른 아침이었는데, 이제 곧 잠에서 깨어날 아이들이 들을까 봐 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활자들이 내 고름 고인 가슴을 갈고리처럼 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이라 하더라도 정확히 과녁을 맞히는 모든 것들은 어떤 쾌감을 동반한다. (p.198~199, "맨발로 글목을 돌다")

군데군데 뚫린 작은 창문 밖으로 잘린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비는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 시체를 소각하는 난로 같은 기구 옆으로 영국의 가톨릭교도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바친 비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를 인솔한 분이 비석에 새겨진 그 글귀를 해석해주었다. 성서의 한 구절이었다. 

 

어두움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순간 다 합쳐서 오십 개도 되지 않는 이 철자들이 아우슈비츠를 떠받치고 있는 그런 이상한 느낌에 나는 사로잡혔다. 몇십만 평방킬로에 이르는 아우슈비츠에서 행해진 악과 비찬과 말살과 공포를 한쪽 추에 달고 이 글자 조각들을 다른쪽 추에 단다면 양쪽이 아주 팽팽해질 것 같은...... 그때처럼 언어의 위대함을 생생하게 느껴본 적은 그 후로도 다시 없었다. (p.211~212, "맨발로 글목을 돌다")

'[리뷰]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스 함무라비  (0) 2023.03.30
비곗덩어리  (0) 2023.03.30
골든 슬럼버  (0) 2023.01.29
나오미와 가나코  (0) 2023.01.27
레디메이드 인생  (0) 2023.01.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