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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비소설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by mariannne 2010. 2. 21.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강인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비슷한 시기에 읽은 "도시심리학"이 '서울'의 심리를 분석했다면, 이 책은 '뉴욕'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과 그 이유를 분석한 것이다. 저자는 저널리스트이며 미디어학자이고, '오마이뉴스' 칼럼니스트이기도 한데, 제목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불온한' 내용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얘기해야겠다.
먼저 표제인 '스타벅스'에 대한 고찰 - 뉴욕의 '스타벅스'는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브랜드가 아닌 '문화현상'인데, 대한민국 스타벅스의 '밝고 활기찬' 분위기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무관심을 파는 커피숍'으로 성장했다. 어느 정도의 거리감과 안락함을 제공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어서, 미국에서는 '빨간색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운전자의 태반이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인데, 이는 "좌석이 두 개 달린 스포츠카를 사려면 우선 자식들이 독립해야 하고, 주택 융자금을 갚은 뒤에도 남는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폭력'이 필수 요소인 미식축구가 인기이며, 패스트푸드 천국인 비만 제국, '이긴 자가 다 갖는 게임'인 선거 제도, 인종 차별은 있어도 '장애인 차별'은 용납할 수 없는 나라, 제약업체의 이기적 이윤 추구와 미국정부, 보험사의 책임 전가로 인해 생겨난 '의약 난민', 역시 민간 의료기관의 이윤 챙겨주기와 정부의 수수방관으로 '환자를 죽음으로 모는 의료체계', 연예인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 이런 것들은 미국, 그 중에서도 뉴욕에 정착한 저자의 눈에 띈 문제점과 몇 가지의 '배워야 할 것들'인데, 어떤 현상들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그 중에서도 '서울'과 조목조목 비교하여 더 우울해지기만 한다. 저자가 '불온한 상상'을 한다는 그 스타벅스는 뉴욕의 어느 거리에 있는 게 아니라 명동이나 이대 앞 쯤일 것이다.

책 속 구절 :
애인을 데리고 와서 부모에게 소개시키고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은 미국에서도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때 미국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음식을 씹어 (때로는 힘겹게) 목 뒤로 넘기는 것뿐이다. 한국인으로서는 부모의 간섭이 적은 것이 부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자식들은 한국에 비해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대신 부모로부터 더 적은 혜택을 받는다.
인간은 영장류 가운데 부모로부터 가장 늦게 독립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한국인의 독립은 평균적으로 미국인들보다 훨씬 늦다. 대학원 학비까지 대주고 서른이 넘은 자식을 결혼 전까지 부모가 데리고 사는 영장류는 오직 한반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오래 보호해주는 대가로 그들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p.28)

2008년 4월 초,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5단체는 정부에 기이한 요청을 했다. "기업 활동에 방해가 된다"며 직장 내 성희롱 처벌과 장애인 채용 의무 완화 등을 요구한 것이다. 입만 열면 정부에 '미국식'을 요구하는 기업들이 이런 부분에서는 '주체적으로' 외길을 간다.
정상적인 사고체계를 지닌 정부라면 당연히 "부끄러운 줄 알라"고 꾸짖었어야 옳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대답은 "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 1990년에 미국의 장애인 법을 통과시킨 사람은 놀랍게도 공화당의 '아버지 부시'였다. 부시 대통령과 그가 속한 공화당은 '친 기업 정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이처럼 말했다.
"(기업들 가운데는) 장애인 보호법이 너무 모호하다거나 지나친 비용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끝없는 소송을 낳게 될 것을 우려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씀 드리건대 저와 의회는 아주 신중하게 이 법안을 작성 했습니다. ...... 우리 다 같이 수치스러웠던 차별의 법을 허물어 버립시다." (p.121~122)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은 자신의 배를 먼저 채우고 이를 방해하는 자에게는 앙갚음하도록 프로그램 된 인간의 '이기적 합리성'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남을 위해 헌신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단순한 '정치적 올바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자산을 민주 사회에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갑게도 현재로서는 별로 그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일요일마다 교회 건물을 채우는 기독교인들이 베풂과 희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축복과 명예를 위해 모여들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자의 승진이나 자식의 명문대 입학을 위해서 교회에 모여드는 사람들, 그들이 지나온 길에는 굶주린 노숙자들이 주목받지 못한 채 앉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큰 문제는 교회가 자신을 향한 정당한 비판과 요구마저 '기독교 탄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정능력을 잃고 외부로부터의 비판마저 불온시하는 교회로부터 희망을 찾기는 어렵다.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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