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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언니의 폐경 : 2005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

by mariannne 2005. 12. 31.

언니의 폐경 : 2005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ㅣ 문예중앙)

“2005년 대한민국 최고의 소설!”이라는, 느낌표까지 붙은 카피가 좀 경박스럽게 느껴지긴 했지만, 수상작과 최종 후보작 리스트에 있는 작가들의 이름을 보니 뭐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이상 문학상과 뭐가 다른 지 모르겠지만, 어찌됐건, 컴필레이션 음반 같은 즐거움을 주는 단품집이 자꾸 나와주니 고맙기만 하다. 김훈, 성석제, 윤대녕, 은희경, 하성란, 박민규, 김연수, 구효서 같은 작가의 작품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다니 말이다.

작년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화장”을 읽고 난 후, ‘역시 연륜… 작가는 경험이 많아야 한다, 상상력도 중요하겠지만, 남 얘기를 하자면 글을 쓰는 손이 불편할 것’이라며 주절주절 글을 남겼는데, 김훈은 참으로 야속하게도, 예순이 다 되어가는 남자이면서, 오십 먹은 여자의 시선으로, 폐경에 이른 언니 이야기를 참으로 아무렇지 않게 써버렸다. 도대체 그런 섬세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가슴이 먹먹해지는 두 자매의 이야기는 김훈이 아니면 쓸 수 없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 굳이 비교하자면 “화장”쪽이 낫지만.

김훈 이외에는,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이건 박민규 단편집 “카스텔라”에서 먼저 읽었다), 박성원의 “인타라망”, 구효서의 “소금 가마니”가 좋았다. 인타라망은 Fukumoto Nobuyuki가 시나리오를 쓴 만화, “고백”을 떠올리게 한다. 대단한 긴장감. 

책 속 구절 :
… 의식이 오락가락하자 자식들은 눈물을 질금거리며 어머니에게 달라 붙었다. 가시면 안 돼요. 천년만년도 더 살아야 돼요. 어머닌 그럴 자격이 있어요.
어머니는 들릴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너, 희, 들, 이, 살, 아, 있, 잖, 니……. 그러곤 죽은 지 육십 년도 더 된 아들과 딸의 이름을 부르며, 잠시 참척의 아픔을 되새기는 듯 입술 끝을 일그러뜨렸다. 형제들마저 잊고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들이었다. 그래요, 이제 그 아들딸 보러 가세요. 큰누님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알아듣겠다는 듯 어머니는 희미하게 웃음지었다. 그리고 곧장 이승의 아흔일곱 해의 생애를 놓았다. – 구효서, 소금 가마니 中에서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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