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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비소설

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by mariannne 2007. 8. 30.


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저 | 푸른숲)

지식인 노동자가 마땅히 해야 할 말들

연극배우 윤석화 씨의 학력 위조 파문이 며칠 동안 화제가 되었을 때, 주철환 씨는 중앙 일간지를 통해 ‘그가 이대를 다녔건 다니지 않았건 여전히 나의 소중한 친구’이며 ‘스스로 한 번 내뱉은 거짓을 즐거워하기보다 고통스러워했으리라고 유추’한다는 옹호 발언까지 해서 욕을 좀 먹었는데, 마침 그즈음 나는 진중권의 이 책에서 다음 대목을 읽게 됐다. - “한 번은 나와 절친한 친구의 글을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 그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는 것과 그의 글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 사이에 나는 아무 모순도 보지 못한다.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누군가 내가 후기에 쓴 그 감사의 말을 인용하며 인간 진중권의 이중인격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다. [...]  아무리 친구라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 지적해야 하는 것이다.”(p.242)

진중권은 그런 사람이다. 친구를 옹호할 수도 있고, 친구지만 그른 것은 그르다 말할 수 있으며, 어떤 쪽이든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는데, 그는 어떤 상황이든 '그래도 좀 너무 하는군'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의 수위까지 언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그가 ‘우익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한 ‘유교적 이상사회’에 대한 이론에 대해 그는 “실제로 우리사회에서 규율이 필요한 사람들은 ‘배 째라’며 막가는 소위 보수주의자들이다. 왜들 이럴까? 그러잖아도 한국, 피곤한 사회다. 나이 몇 살 더 먹었다고 건방지게 “인간”이 되라는 둥, 말라는 둥 충고를 하며 제 개인적 인생관을 막 남에게 강요한다. 도덕이 그렇게 좋으면 자기만 지키면 될 일이지, 왜 자기 도덕을 남에게 강요하는 걸까?”(p.103)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냥 자기 생각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반대를 위한 문법적 착각”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남이 동성을 사랑하든, 이성을 사랑하든 내가 거기에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런 것들은 ‘찬성’이나 ‘반대’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맥락이 아니다. (중략) 하지만 이렇게 남의 인권을 침해하는 어법이 우리 사회에서는 공공연히 통용되고,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여겨진다. 사회 자체가 보수 이데올로기의 마법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p.160)라 하기도 하고, “우리 사회에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한, 우리 모두는 어떤 비열한 살인의 공범이다”(p.148)라는 등, 바른 소리를 끊임 없이 해대지만, 사람들은 그의 태도가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다. 게다가 또 얼마나 잘난척은 심한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 망탈리테가 정치적 국가주의, 경제적 자유지상주의, 문화적 보수주의의 세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 작업을 통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리고 소우주 속에 대우주가 반복된다고 본 르네상스의 독해법이 틀리지 않아, 마치 프랙털(fractal) 구조처럼 이 거시적 이념의 좌표가 우리 사회를 이루는 자디잔 미시구조들 속에 무수히 반복되며..."라는 대목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는 그의 글들을 폭력, 죽음, 자유, 공동체, 처벌, 성(性), 지식인, 공포, 정체성, 민족, 힘, 프랙털 등 12개의 주제로 분류해서 묶었다. 어떤 장이든, 어이없다는 말로 시작해 불만과 비판, 빈정거림과 반어와 같은 의문으로 이어진다. 그게 거슬리면 읽지 않아야겠지만, 형식보다는 내용에 있어서 바르고 고운 면들이 많으니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책 속 구절 :
한국 자유주의의 세 얼굴. 얼마나 다른가? 이 중 현대적 기준에 따라 "진정한 자유주의자"라 부를 수 있는 건 공병호도 아니고, 복거일도 아니고, 오직 고종석 씨뿐이다. 진짜 자유주의자라면, '자유'라는 말로 경제적 자유 이상의 것을 의미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교양이다. 또 시장을 만능 '해결'로 보는 수준을 넘어 동시에 그것을 '문제'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평등을 자유와 대립시켜놓고 '골라, 골라' 야바위를 하는 수준을 넘어 '정의'라는 이름으로 평등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게 현대적 자유주의의 수준이다. 그런 교양과 상식과 수준도 갖추지 못한 주제에 여기저기에 "스스로를 자유주의"라 부르고 다니고, 심지어 남에게 "진정한 자유주의자"라 불러달라고까지 부탁하는 이 뻔뻔함. 그 앞에서 진짜 자유주의자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p.92)

흔히 홉스와 로크를 자유주의의 선구자로 꼽는다. 이 두 사람은 동일한 철학적 전제에서 출발하여 각각 상이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여기서 자유주의의 두 가지 버전이 성립한다. 로크에게 천부인권이란 결코 양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절대군주의 월권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권력분립) 마련에 관심을 기울인다. 반면 홉스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가 인간늑대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자연 상태로 떨어지지 않게 막는 것이었다. 그에게 권력분립이란 곧 무질서를 의미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권력을 절대군주에게 위임하되, 군주가 경제의 영역에 개입하여 또 다른 경제 요인이 되는 것을 막는 데에 주력한다. 로크가 주로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동시에 주장했다면, 홉스는 정치적 자유보다는 주로 경제적 자유에, 즉 경제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절대군주의 간섭을 막는 데 관심이 있었다.

이 두 가지 버전의 자유주의는 오늘날에도 공존한다. 가령 "전두환의 과감한 자유주의 정책" 운운하며 그의 치적을 찬양하는 복거일 씨 앞에서 고종석 씨가 느낀 당혹감은 홉스 앞에서 느꼈을 로크의 당혹감에 견줄 만한 것이다. 사실 정치적 자유를 포기한 이런 자유주의 유형은 제3세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유주의 경제각료를 거느린 칠레의 피노체크 정권이다. 그의 치하에서 칠레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했지만 그 대가로 중소기업은 초토화하고 사회의 빈부 격차는 더욱 더 벌어졌다. 자유주의가 독재와 결합한, 역사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예는 나치정권이었다. (p.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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