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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사회·정치·역사

직선들의 대한민국

by mariannne 2010. 5. 9.


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08-06-12


경제학자인 우석훈이 '미학'을 고민하는 것은 '직선들의 대한민국'이 싫어서다. '불도저가 지배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직선들만 넘쳐나는 현재에 머무르고 싶지 않고, 아름다움이 꽃처럼 피어나는 또 다른 미래로 가고 싶다'(p.154)는 그. '건설 미학의 절정기로 되돌아가려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 측근들을 생각하면 새로운 양식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p.153)는 저자는 이대통령 취임 초기에 있었던 '국민들의 강도 높은 비판'이 '예술적 정형화' 없이 '정치적 반발' 정도에서 그칠까봐 우려하는 사람 중 하나다.

망각할 것인가, 기억할 것인가? 사실 이렇게 질문하면 안 된다. 인간은 어차피 망각하는 동물이고, 아무리 높고 격약된 감정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런 감정의 굴곡은 사라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은 반드시 미학적 차원에서 형상화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다른 방향의 사회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학자인 나는 지금 한국 사회의 전개 과정을 이끌 열쇠가 바로 예술가들의 손에 쥐여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을 바꾸는 것이 '경제의 힘'이었던 시대를 바꾸는, 그야말로 전격적인 패러다임 전환의 순간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p.153~154)

'속도의 문화'에 중독되고, '성장'과 '개발'에 집착하는 바람에 딜레마에 빠진 대한민국을 향해 그는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살아 있다는 권리를 주장하라'고 말한다. 88만 원 세대에게 '짱돌을 들어라'고 말한 것처럼. 그 권리는 사실 현재의 성인들의 것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투표권이 없는 다음 세대의 생태적 권리 혹은 생존권'이기 때문에 이를 지지해주는 것은 성숙한 인간의 '어른다움'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존중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책 속 구절 :
서울시에서 추진한 뉴타운의 경우에 집이 없는 거주민들도 개발을 지지한다. 현재까지의 경향으로 보면, 원래 그 동네에 살던 사람의 10퍼센트 정도만이 새로 만들어진 뉴타운에 입주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도심에서 더 먼 곳으로 이사하거나 원래의 거주 조건보다 더 나쁜 곳으로 이동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뉴타운 계획에 대한 의사결정이 강제된 것이 아닌 이상 부결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물론 그런 일은 중원 뉴타운과 같이 에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없었다. 이건 경제이성도 아니고 상식도 아니다. 자기가 살던 동네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와 좋아질 거라고 기뻐하면서 정작 자신이 살던 집과 주거지역에서 쫓겨나도 좋다고 결정하는 집단적 의사결정은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이상은 물론 상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아파트의 직선적 아름다움을 너무 사랑했다고 설명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p.83, '집 없는 사람들이 집값이 오르면 환호한다')

이상의 "오감도"는 지난 10년을 거치며 질주하는 13인과 무서운 다수, 그리고 이들을 무서워하는 소수로 구성된 토목건설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현재의 모습을 상징한다. 13인의 아해 중 이를 무서워하는 두 명 혹은 한 명이 미학적으로 소외되었을 뿐이다. 이 건설 한국의 모습, 보통 토목공화국이라고 부르는 이 시대에 무죄는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가 참여하여 불도저에 연료를 대어주었던 셈이다. 무섭거나 무섭지 않거나 어쨋든 불도저는 달려가고, 이 불도저의 방향이 '조감도'라고 상상하며 박수 치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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