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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고래

by mariannne 2010. 3. 7.
 
 
 


고래 (천명관 지음ㅣ 문학동네)


책을 읽은 시간은 일주일정도이지만, 그동안 너무나 오랜 세월을 살아낸 기분이다.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나 펄 벅의 "대지"처럼 방대하기 짝이 없는 스케일의 소설이고, (신화적 상상력이라 해야할 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믿을 수 없는 사건을 실제 일어날 수도 있을거라 믿고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고, 한 번에 다 읽기 버거운 분량이라 밥을 먹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출근을 해야 하거나, 밤이 되어 잠을 자야 할 때 책을 놓아야하는 아쉬움이 큰, 그런 소설이다.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2004년)이며 이때의 심사위원인 소설가 은희경의 평처럼 "누구든 이 작가의 입심에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고, 문학평론가 신수정의 말처럼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그 유구하고 장려한 시간에 압도당"하게 된다.  
실제로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이 있을까싶은 인생을 살다 간 금복, 평생 그 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생선장수, 범상치 않은 기골의 걱정, 칼잡이, 文, '붉은 벽돌의 여왕' 춘희, 쌍둥이 자매, 국밥집을 하던 박색 노파, 벌치기 애꾸, 약장수, 뛰어난 미모의 수련, '어릴때 공장 마당에서 팔씨름을 벌였던 바로 그 소년' 트럭 운전사, 분노의 무당벌레... 이 소설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은 이외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생존을 위한 노고와 죽음과 복수와 용서와 이해와 사람사이의 정情과 돈과 사랑 비슷한 감정과 수많은 법칙들로 이루어지는 이 소설은 정말이지 놀랍고 멋진 작품이다.

책 속 구절 :
어쨌거나 철도공사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외지에서 일거리를 찾아 뜨내기들이 하나둘, 평대로 모여들었다. 목도꾼을 위시한 철도 인부들과 현장소장을 위시한 건설회사 직원들이 먼저 들어오고 그들을 상대로 한 술집과 음식점이 들어서자 뒤따라 몸 파는 여자들이 들어오고, 또 그네들을 상대로 한 도붓장수와 등짐장수, 방물장수가 들어오고, 마침내 일 년 뒤 기차가 마을 앞을 지나다니게 되자 일을 하다 다친 인부들을 치료해줄 의원과 영혼을 치료해줄 목사와 전도사, 신부와 중이 기차를 타고 한꺼번에 들어오고, 예배당과 성당과 절이 한꺼번에 세워지고, 다시 예배당과 성당과 절을 지을 인부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다시 그들을 상대로 몸을 팔 여자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이런 식으로 일거리를 찾아, 볼거리를 찾아, 기회를 찾아, 건수를 찾아, 신도를 찾아, 짝을 찾아 먼 도시 또는 인근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훗날 평대의 향토사학자들은 이때의 갑작스런 인구팽창을 가리켜 '평대의 일차 빅뱅'이라 일컬었다. (p.148)

잠시 후, 금복의 몸 구석구석을 찍은 엑스레이 사진이 나오자 그녀는 마치 진기한 보물지도를 들여다보듯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 탐스러운 머리카락과 풍만한 엉덩이, 뜨거운 눈빛과 발그레한 뺨은 모두 사라지고 죽은 나무 삭정이 같은 앙상한 뼈만 하얗게 남아있었다. 금복은 사진을 집으로 가져와 전등불에 비춰보며 흘린 듯 며칠 동안 관찰하다,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러니까 다 껍데기뿐이란 말이군. 육신이란 게 결국은 이렇게 하얗게 뼈만 남는 거야.
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 자신이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죽어지면 썩어질 몸'이란 말을 자주 되뇌었다. 그리고 곧 내키는 대로 아무 사내하고나 살을 섞는 자유분방한 바람기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평생을 죽음과 벗하며 살아온 그녀가 곧 스러질 육신의 한계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덧없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p.216)

文에게 소문을 전해준 사람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 수백 마지기를 노름으로 몽땅 날리고 마누라까지 잡힌 끝에 결국 오갈 데 없는 뜨내기 신세가 된 한 나이든 인부였다. 그는 한껏 조심스럽고 완곡하게, 언제나 소문과 함께 장식처럼 따라다니는 변명들을 장황하게 섞어, 예컨대, 자신을 결코 입이 싼 사람이 아니며, 본시 떠도는 소문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쓸데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며, 그런 짓은 앉아서 오줌누는 계집이라면 모를까 불알 달린 사내로서 차마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못 들은 걸로 하고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당사자를 위하는 것이냐, 아니면 들은 대로 정직하게 알려주는 게 올바른 것이냐 하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하다, 그래도 혹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소문이 사실일까 염려되어, 만일 그렇다면 혼자만 모르고 있는 文이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나 되지 않을까 걱정되어, 다시금 얘기하지만 자신은 그저 오로지 文을 생각하는 마음에 털어놓기는 털어놓되, 소문이란 건 어디까지나 믿을 게 못되는데다 나중에 알고 보면 결국 뜬소문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아, 그럴땐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게 상책이니, 구태여 진실을 캐고자 하면 못 캘 것도 없지만, 꼭 그렇게 해서 사달을 일으켜야만 속이 풀리는 건 아니더라도, 이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한번 확인을 하는게 어떨까 싶기도 한데, 한편 생각하면 그저 술 한잔 먹고 잊어버리는 게 현명한 처신이 아닐까 싶기도 한 게 아닌 게 아니냐며, 병을 주는 동시에 약을 주는 요사스런 화법으로 그 수상한 소문을 전했을 때, 文은 그 자리에서 소문을 전한 인부를 당장에 해고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말을 전한 인부 앞에서 욕을 하며 세 번 침을 뱉은 후 흐르는 계곡 물에 귀를 씻었다.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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