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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추락

by mariannne 2023. 1. 17.

추락
J. M. 쿳시 저/왕은철 역 | 동아일보사 | 원제 : Disgrace (1999) 

쉰둘의 이혼남 데이비드 루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의 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어느 토요일 저녁, 길에서 그의 낭만주의 시(詩) 강의를 듣는 스물 한 살의 멜라니 아이삭스를 발견하고 갑작스레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그녀 역시 그가 싫지 않은 듯 그의 유혹에 화답한다. 그렇게 몇 번을 만나 관계를 가졌고, 그게 문제가 되어 학교에서는 '성희롱 교수'를 처벌하려는 징계위원회가 열린다.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루리는 학교에서 쫓겨났고, 멀리 떨어져 사는 딸 루시를 만나러 동부 케이프로 간다.     

루리의 딸 루시는 케이프의 도심에서 몇 마일 떨어진 한적한 농장에서 혼자 살고 있다. 함께 살던 여자친구는 떠났고, 가까이에서 일을 도와주는 흑인남자 페트루스와 그녀를 지켜주는 개들이 있을 뿐이다. 딸과 함께 지내는 몇 달 동안, 루리는 다시 한 번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되는데, 흑인 남자 세 명이 들이닥쳐 딸을 강간하고, 그를 불에 태워 상처를 입힌 후 물건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딸의 행동이다. 그녀는 그런 일을 겪은 후에도 그 곳을 떠나려 하지도 않고, 심지어 임신이 된 것을 알고도 아이를 낳겠다고 한다. 그 모든 일을 농장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가로 생각하는 듯했다.  

소설의 원제는 '치욕(disgrace)'이고, 역자는 일부러 번역본의 제목을 '추락'으로 했는데, 어느 쪽이 되었건, 그 주인공이 루리를 가르키는 것 같지만, 사실 더 큰 '치욕'을 당한 사람은 딸인 루시다. 소설의 배경은 아마도 20세기 후반일 것이다. 1948년부터 시작된 남아공의 백인정권은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1994년에 끝이 난다. 이 소설이 1999년에 발간되었으니, 루시가 당한 일은 남아공에서 백인 여성의 '추락'을 말하는 것이고, 그 가해자는 자연스레 흑인 남성들이 된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제 생각에는 제가 그들의 영토 안에 들어와 있어요. 그들은 저를 점찍었어요. 그들은 저한테 돌아올 거에요." 그리고 덧붙인다. "만약... 만약 그것이 제가 여기에 머무는 것에 대한 값으로 지불해야 하는 거라면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요. 어저면 저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지 몰라요. 그들은 제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빚지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들은 자신들을 빚쟁이나 세금징수원으로 생각하죠. 왜 저는 아무런 값도 지불하지 않고 여기에 살아야 하나요?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거에요." (p.238) 


책 속 구절: 

그는 며칠동안 블랙커피와 시리얼로 버티며, 바이런과 테레사에게 매달린다. 냉장고는 비어 있다. 침대는 엉망이다. 깨진 유리창으로 들어온 나뭇잎들이 마룻바닥에 흩날린다. 그는 생각한다. 상관없다.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 (p.278)

"로잘린, 내 인생은 내던져진 게 아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사실이 그래요! 당신은 직장을 잃었고, 당신 이름은 먹칠을 당했고, 당신 친구들은 당신을 피하고, 당신은 거북처럼 껍데기 밖으로 목을 내놓기를 두려워하며, 토란스 가에 숨어 살고 있어요. 당신의 구두끈을 맬 정도도 못 되는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농담을 하고 있어요. 당신 셔츠는 다리미질도 돼 있지 않고, 세상에 머리는 어디서 깎았는지, 당신은...."
그녀는 잔소리를 그만둔다. 
"당신은 쓰레기통이나 뒤지는 한심한 늙은이로 끝날 거에요."
"나는 땅 속의 구멍에서 끝날 거야. 당신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그래."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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