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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비소설

밤이 선생이다

by mariannne 2023. 1. 12.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저 | 난다 

지난 5월 19일, 노회찬 의원이 5당 원내대표 회동으로 청와대에 방문하면서 유쾌한 김정숙 여사께 선물하기 위해 들고 간 책이다. 왜 이 책인가 하면, 그저 이 책이 좋은 책이라서 그런 것이다. 저자는 올해 일흔 셋의 고대 불문과 명예교수 황현산으로, 2000년대 초에 국민일보에, 2010년 전후해서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칼럼 등을 모아 2013년에 출간한 것이니, 특별히 요즘에 눈여겨 봐야 할 이슈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다. 이슈는 없어도, 이 책은 노무현 시대를 살면서 쓴 내용이 많기도 하거니와 맨 마지막 칼럼은 "삼가 노 전 대통령의 유서를 읽는다"라는 게, 의미가 있긴 하다. 

노회찬 의원 덕분에 이번에 알게 된 저자인데, 아내와 딸이 빌려와 읽는 "파인애플 아미"와 "미스터 초밥왕"을 보고 "이 아까운 시간에 왜 그따위 것을 읽고 있느냐"고 핀잔을 주다가, 오히려 더 깊이 빠져 다 읽고 말았다는 것이나, 5백 기가 외장 하드에 가득 찬 미드를 다 보고 "미국은 나라가 커서 좋겠다!"라고 탄성을 내질렀다는 것을 읽자니, 재미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 첫머리에 '천년 전부터 당신에게'라고 쓴 말부터 좋았는데, 불문학을 공부했고 문학비평과 프랑스문학 번역본을 여럿 낸 학자의 글 답게 물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읽힌다. 그동안 외부에 발표한 글을 모두 모아 낸 책이라 이제 다시 산문집을 낼 것 같지는 않아 아쉽고.   


책 속 구절: 

언젠가는 교육부의 관리가 프랑스의 불문학 박사보다 한국의 불문학 박사가 더 많다는 얼토당토않은 낭설을 TV방송으로 퍼뜨렸으며, 가끔은 대학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이제는 영어 하나면 어디서나 통하니까 프랑스어 교육은 필요 없지 않느냐고 넌지시 묻는다. 교육부 관리의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프랑스어 교육 불필요론 앞에서 나는 프랑스어가 무역이나 여행을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거나(실은 그런 일에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불어불문학과에서 프랑스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데, 상대방은 뒤이어질 말을 듣고 싶은 기색이 아니다. 프랑스의 역사가 현재 세계의 문화적 · 정치적 지형도의 형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프랑스어로 작성되었으며 지금도 작성되고 있는 많고도 중요한 문헌에 관해서는 말할 틈조차 없다. 그 질문은 처음부터 내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사회의 발전에서 앞으로 오게 될 세계의 그림을 문학이 항상 먼저 그려왔으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의 세계관에 적대할 사람들을 불어불문학과에서 기르고 있다고 아연 긴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불어불문학과를 비롯한 유럽 어문학과는 졸업 후 취직이 특별히 어려운 학과도 아니다. 대기업에 무더기로 취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계에서 연예계까지 각종 문화산업의 미묘한 자리에는 유럽 문학과 출신들이 어김없이 끼어 있다. 다양한 장르의 물필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 문학으로 함양한 개성과 재능을 토대로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영화감독, 작곡가, 디자이너도 적지 않다. 외국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효과는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이 삶의 안팎에 퍼져 있으나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적다. 그 효과가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적다. 불어불문학과에서 무엇을 공부하는지 설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은 해두자. 어느 젊은 출판인이 교수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여, 그래 프랑스에서 발간된 인문학 서적들을 번역하는 일이 시급한데, 마땅한 번역자를 구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그 까다로운 문장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깊이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지어, 이 서적들을 번역해낼 만한 소수의 사람들은 저 모욕적인 질문을 자주 받으며, 제 공부의 터전에 위기까지 느끼면서 노력해온 사람들이다. (2010, p.44~45,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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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에 만난 국사 선생은 사실 국사 선생으로 짐작되는 사람이다. 국립박물관의 고려청자 전시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무리의 중학생과 인솔 교사가 들어왔다. 그때 나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 "이 도자기들은 고려의 도공들이 억압 속에서 노예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으며, 차라리 증오해야 할 물건들"이라고 그 젊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단언했던 것이다. 

도공들이 뼈저린 고통 속에서 살았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들의 신분은 비천했으며 그들의 작업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제 손목을 자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비록 노예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이룩한 작업의 가치를 그 생산제도의 성격으로만 따질 수 있을까. 도공들이 그 아름다운 그릇들을 억압과 고통 속에서, 원한과 분노 속에서 만들었지만, 도공들은 또한 그 도자기를 통해 자기 재능을 실현하고, 자기가 살고 싶은 세계에 대해 그 나름의 개념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그 소망이 없었다면 도공들은 그 아름다움을 어디서 끌어왔겠는가. 그리고 그 소망은 우리의 소망이 아닐 것인가. 교사는 도공들의 편에 서서 말한 것이 아니라 도공들을 모욕한 것이다. (p.79, 두 국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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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연구실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를 하다가 저녁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시는 교수가 있다. 가족들이 좋아할 리 없다. 그 교수가 이런 농담을 했다. "아버지를 닮지 말자, 이게 우리 집 가훈이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젊은 교수가 흥을 돋우었다. '아버지를'보다 '아버지는'이라고 해야 더 강력한 표현이 된다는 것이다. 나이 든 국문과 교수가 교수답게 훈수를 했다. '이버지는'이 더 강할지 모르겠으나 '아버지를'이 정식 표현이라고 지적하고 나서 "그래도 가훈인데"라는 말을 덧붙여 농담을 마무리했다. (p.107,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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