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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양을 쫓는 모험

by mariannne 2012. 2. 22.

양을 쫓는 모험
무라카미 하루키 저/신태영 역 | 문학사상사

하루키 초기 3부작 중 마지막인 "양을 쫓는 모험"은 앞선 두 권보다 훨씬 길고(개정판은 두 권으로 나뉘어졌을 정도다), 줄거리가 확실하다. 그러니까, 줄거리만 잘 쫓아가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인 '나'는 이제 서른을 넘었고, 번역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스무 살에 만난 열일곱의 '그녀'가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있었다. 아내와 '나'는 특별한 트러블은 없지만 이혼하기로 한다.

이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귀모델인 여자를 만났고, 그리고 곧 기묘한 일이 펼쳐진다. 제이스바(Bar)에서 늘 만나던 '쥐'가 사라지고, 우익쪽 거물 인사의 비서라는 사람이 찾아와 어떤 '양'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처음에는 그 말을 무시하려고 하지만 귀모델인 여자의 부추김으로 '나'는 양을 찾아 훗카이도로 떠난다. '돌고래 호텔'에 여정을 풀고 '양'을 찾기 시작한 그들('나'와 귀모델인 여자)은 '양박사'를 만나 양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양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산장에서는 양의 가죽을 쓴 양사나이도 등장한다.

이 묘한 줄거리의 소설에서 '양'의 의미가 무엇인지, '쥐'는 왜 사라졌는지 생각하는 것보다, 주인공이 마지막 며칠동안 산장에서 지내는 일상이 부러워졌다. 현실의 압박 따위는 초연한 듯한 서른의 '나'는 얼마나 여유로우신지!  읽을 때 마다 다른 생각을 갖게 하는 소설로, 십 수 년 후 다시 읽고 싶다.  

책 속 구절:
6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그녀가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캔 맥주의 고리를 손가락에 끼고 장난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여유 있는 말투로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에요?"라고 물었다.
"어떻게 되든 좋다는 건 아니야"라고 나는 대답했다.
한참 후에 그녀는 "사실은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럼 헤어지지 않으면 되잖아"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어도 이제는 아무데도 갈 수 없어요."
그녀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몇 달 후면 서른이 되고 그녀는 스물여섯이 된다.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일의 크기에 비하면, 이제까지 우리가 쌓아 온 일 따위는 정말로 하찮은 일에 지나지 않았다. 또는 제로였다. (p.43~44)

"그렇다면 귀를 내놓고 있을 때의 너와 귀를 내놓고 있지 않을 때의 너는 다르다는 거야?"
"그렇지요."
두 명의 웨이터가 접시를 치우고 수프를 가져왔다.
"귀를 내놓고 있을 때의 너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 않을래?"
"꽤 오래된 일이라서 제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사실 열두살 때부터 귀를 내놓은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하지만 모델 일을 할 때는 귀를 내놓잖아?"
"네. 하지만 그건 진짜 귀가 아니에요."
"진짜 귀가 아니라구?"
"그건 폐쇄된 귀예요."
나는 수프를 두 모금 마시고 나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폐쇄된 귀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을래?" (p.61)

"당신은 아마 내가 하고 있는 말이 허황되다고 생각하겠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정말로 허황된지도 모르네. 그러나 우리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희망을 자네가 이해해 주기 바라네. 선생님이 돌아가신다. 하나의 의지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 의지의 주변에 있는 것도 모두 사멸한다. 뒤에 남는 것은 숫자로 셀 수 있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그 양을 찾아야겠네."
 그는 처음으로 몇 초 동안 눈을 감았고, 그 동안엔 침묵이 흘렀다.
"내 가설을 말하겠네. 어디까지나 가설이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잊어버리면 그만이지. 나는 그 양이야말로 선생님의 의지의 원형(原型)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네."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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