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소설78

동경만경 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저 | 은행나무) 도쿄만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그린 소설이다. 책 소개 페이지에는 ‘사랑 때문에 상처받은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 소설에는 ‘정말 사랑’이 없다. 이런 정서에 어떻게 몰입해야 할까. ‘바보 같은 짓을 하다 멀리서 느껴지는 차가운 시선에 돌아다보면’ ‘한심스러워 하는 얼굴’ 혹은 ‘따분해하는 얼굴’(p.235)로 상대방을 쳐다보는 고등학생이 그냥 나이만 먹어버린 듯한 캐릭터가 이 소설의 중심에 있다. 그게 미오(료코)다. 주인공 료스케는 마리를 향해 ‘그녀가 굉장히 좋은 여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단정한 마리의 옆모습을 아무리 쳐다봐도 역시 그 이상의 느낌이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p.47)고 생.. 2006. 10. 4.
이별의 말은 나로부터 이별의 말은 나로부터 (유이카와 케이 지음 | 문이당) 알고 있다면, 돌아서라 유이카와 케이에 대해 실망을 안겨준 책이기도 하지만, 그녀만큼 이런 내용을 잘 다룰 사람이 없겠다는 점에서 한 번 읽어보라 권하고 싶기도 하다. “어깨너머의 연인”이나 “매리지 블루” 같은 소설이 공감대 만점의 전형적인 두 인물의 삶을 다룬 것이라면, 이 책은 그 전형적 케이스를 사건별로 짧게 소개하고, 인생 충고를 들려주는 식이다. 이를테면, * 연락이 뜸해진 애인, 알고 봤더니 친한 친구와 만나고 있더라 * 9년 사귄 남자친구와 당연히 결혼을 할 거라 생각했는데, 뭔지 모를 괴리감에 결별을 결심하게 되더라 * 어떤 일이든 함께 한 동아리 친구들, 평생 모임이 지속될 줄 알았으나, 사회 생활 1년 만에 모임이 깨지더라 * 친.. 2006. 5. 7.
도쿄기담집 도쿄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연달아 읽은 세 권이 우연찮게도 모두 일본 소설이다. 바나나, 가오리에 이어 이번에는 5년 만에 나왔다는 하루키의 단편집. 제목이 “도쿄 기담집”이라 왠지 ‘괴담’일 것 같았는데, 하루키의 이전 단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어차피 그의 소설은 대부분이 기담이니까.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갑작스레 나타난 사람들, 자신의 일부분(이를 테면 갑작스레 ‘아들’을 잃는다든가, 다른 건 정상인데 자신의 ‘이름’만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든가, ‘금방 가겠다’고 전화 한 남편이 사라진다든가 하는)을 상실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 기이한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하는 게 하루키 소설의 특징이다. 이를테면 ‘뭔가 딱히 집어 낼 수 없는 하나의 요소가 상실되어 기.. 2006. 4. 16.
불륜과 남미 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ㅣ 민음사)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이제 그만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이 책의 표지와 제목을 본 순간, 이전 소설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 싶어 또 집어 들었다. 바나나의 이전 소설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키친”이나 “암리타” 같은 건 소장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헌데, 이 책을 읽으니 또 다시 ‘이제 바나나의 책은 그만 읽어야겠군…’하는 생각이 든다. 남미를 여행하며 얻은 영감으로 써 내려간 단편들. 제목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불륜’에 대한 얘기가 빠지지 않고, 노골적으로 ‘불륜’이라는 말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남미와 불륜이 무척 잘 어울린다. 소설 속 ‘불륜’의 주인공은 모두 일본인이지만, 그들은 모두 아르헨티나 어딘가의 호텔에서 .. 2006. 4. 14.
도쿄 타워 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지음 ㅣ 소담출판사) “세상에서 가장 슬픈 풍경은 비에 젖은 도쿄 타워이다” – 에쿠니 가오리식 감성의 첫 문장이다. ‘2005 네티즌 선정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는 “도쿄 타워”. 다시 한 번 가오리 열풍이 불었나 보다. 하긴, 그녀의 소설은 나오는 것 마다 인기지만. 도쿄 타워를 바라보며 자라난 스무 살 젊은이들의 절망적인 사랑… 이라고 하면 너무 진부한가. 그 사랑의 상대가 스무살이나 많은 ‘아줌마’라면? 이 어처구니 없는 ‘불륜 행각’을 가오리만의 감각으로 포장하니 ‘작품’이 된다. 사실 그렇게 열광할 만한 소설이 아닌데도 말이다. “냉정과 열정사이”부터 이어져 온 그녀의 짧고 건조한 문체는 여전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당히 ‘쿨’한 상태를 멋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특.. 2006. 4. 13.
모래의 여자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지음 ㅣ 민음사) 이야기의 설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휴가를 이용하여 기차를 타면 반나절 걸리는 해안으로 떠난 채 소식이 끊어진 것이다. 수색 신청서도 신문 광고도 모두 헛수고였다.” - 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피츠제럴드 단편선 중 “기나긴 외출”의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 루이 16세가 발뤼 추기경을 육 년이나 연금했던 쇠로 만든 옥사(獄舍)에 대해 언급한 뒤에는 비밀 지하 감옥과 그런 공포감을 자아내는 일들에 대해 애기를 나눴다. 나는 후자 중에 몇 개, 즉 사람 하나를 던져 놓고 무한정 기다리게 만드는, 깊이가 30~40피트가 되는 물이 마른 우물들을 구경한 적이 있다. 풀먼식 열차의 침대차도 악몽으로.. 2005. 11. 24.
어둠의 저편 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ㅣ 문학사상) ‘트롬본하고 오븐 토스터의 차이가 뭔지조차 모’르지만 ‘구찌와 프라다의 차이라면 한눈에 알’(p.35) 것 같은 언니는 두 달 째 잠을 자고 있다. 코마 상태도 아닌데 “지금부터 한동안 잠을 자겠다”고 한 이후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 그런 언니를 견딜 수 없는 동생은 집에 있지 못하고 한밤중에 거리를 서성이게 된다. “어둠의 저편”은 그 중 하룻밤의 이야기. “하루키 데뷔 25주년 기념 작품”이라는 거대한 타이틀 때문에 그의 팬들을 흥분의 도가니에서 실망의 나락으로 빠져 들게 한 문제작이다. 한 블로그에서는 "더 나아지길 기대하는 열망이 더 뒷걸음치게 만들기도 한다 도대체 그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가?”라 했고(적절한 표현이다), “그래도 읽어야 겠죠?”.. 2005.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