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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어둠의 저편

by mariannne 2005. 8. 27.

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ㅣ 문학사상)

‘트롬본하고 오븐 토스터의 차이가 뭔지조차 모’르지만 ‘구찌와 프라다의 차이라면 한눈에 알’(p.35) 것 같은 언니는 두 달 째 잠을 자고 있다. 코마 상태도 아닌데 “지금부터 한동안 잠을 자겠다”고 한 이후로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 그런 언니를 견딜 수 없는 동생은 집에 있지 못하고 한밤중에 거리를 서성이게 된다. “어둠의 저편”은 그 중 하룻밤의 이야기. “하루키 데뷔 25주년 기념 작품”이라는 거대한 타이틀 때문에 그의 팬들을 흥분의 도가니에서 실망의 나락으로 빠져 들게 한 문제작이다. 한 블로그에서는 "더 나아지길 기대하는 열망이 더 뒷걸음치게 만들기도 한다 도대체 그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가?”라 했고(적절한 표현이다), “그래도 읽어야 겠죠?”라는 질문에 “안타깝게도... 그게 독자들의 숙명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다(모범답안!). 물론 읽어야지. 솔직히 그리 나쁘진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그가 좀 더 심오하고 어마어마한 작품을 써 내길 바라고, 그에 미치지 못하면 가차 없이 돌을 던질 기세다. 불쌍한 하루키. 그래도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의 단편 소설이 때론 장편이 되고, 단 권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던 작품이 2권, 3권, 4권으로 이어지듯이 이 책 역시 너무나 많은 여지가 남아 그냥 끝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마리와 에리는 물론, 마리와 다카하시의 재회도, 카오루와 호텔 알파빌 이야기도, 시라가와의 최후도 모두모두 남아 있지 않은가.
특별히 번역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가 지적한 대로 역자가 이미 일흔을 훌쩍 넘긴 분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래서 더욱 ‘역자의 말’을 세심하게 읽었는데, 별다른 의문은 들지 않고, 쥘 로맹의 “선의의 사람들”이란 책이 번역되어 있는지 궁금해졌을 뿐이다. 책장을 끝까지 넘기니 드는 생각인데, 이 책에서 제일 좋은 것은 맨 마지막 장에 나오는 “어둠의 저편”에 나오는 음악들 리스트가 아닐까.

책 속 구절 :
“죽어버리면 그 다음은 무無밖에 없다, 이 말이지?”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마리는 말한다.
“나는 말이야, 윤회 같은 게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뭐라고 할까, 그런 게 없다면 너무 두려워. 그 무라는 걸 나는 이해할 수 없거든.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어.”
“무라는 건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니까, 특별히 이해하거나 상상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만, 만에 하나, 그 무라는 것이 이해나 상상 같은 걸 확고하게 요구하는 종류의 무라면 어떡해? 마리 짱도 죽어본 적은 없잖아. 그렇다면 실제로 죽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건 확실히 그렇지만…… .”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말도 할 수 없는 두려움이 서서히 어김없이 엄습해 오는 거야”라고 고오로기가 말한다. (중략)

“그래도 나에겐 역시,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져요”라고 마리가 말한다.
“그건 말이야, 아마도 마리 짱이 정신적으로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요?”
고오로기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리 짱은 단단하게 자기의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 (p.228~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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