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소설

1973년의 핀볼

by mariannne 2012. 2. 15.

1973년의 핀볼(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저/윤성원 역 | 문학사상사

무라카미 하루키 "초기 3부작"(또는 '쥐' 3부작이라고도 하는) 중 두 번째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양을 쫓는 모험” 사이에 있는 소설이다. 하루키 초기작에 열광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게 뭐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텐데, 특별히 줄거리랄 게 없고, ‘상실’과 ‘허무’의 이미지와 모호한 은유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지도.

소설은 친구와 함께 번역 사무실을 차려 직접 번역일을 하는 주인공 ‘나’와, 중국인이 경영하는 제이스바(bar)를 들락거리는 ‘쥐’의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된다. 연인 나오코가 죽은 후 상실감에 사로잡힌 ‘나’는 죽기 전 나오코가 말한 기차역으로 가 어슬렁거리는 개를 발견하고 돌아온다. 이후 ‘나’는 우연히 만난 쌍둥이 자매(‘핀볼’의 양쪽 홀을 의미하는)와 함께 살면서 핀볼게임 ‘스페이스십’에 몰두하게 되는데, 오락실이 폐업하여 핀볼게임기가 사라진 후 이 게임기를 찾기 위해 애쓴다. 겨우 게임기를 찾게 되었을 때 '나’는 이전의 게임 기록을 깨기 위해 다시 도전하지 않고, 게임기를 그대로 둔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쌍둥이는 그를 떠난다.

하루키의 다른 소설들처럼 어떤 사물(핀볼 게임기)은 여자를 의미하고, 주인공은 여자에게 하듯 사물을 대한다. 이제 1973년의 핀볼은 사라졌고, 나오코는 죽었으며, 쌍둥이도 없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계속되는 것이다. 


책 속 구절:
금성에서 태어난 조용한 사나이는 말했다.
"설사 오늘 누군가가 죽는다 해도 우리는 슬퍼하지 않는다네. 우리는 죽음이 눈앞에 있는 만큼 살아 있을 때 사랑해 두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야." (p.32)

그녀는 멋있었다.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 나만이 그녀를 이해했고, 그녀만이 나를 이해했다. 내가 플레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그녀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점수판에 제로를 여섯 개 표시하고는 내게 미소를 보냈다. 나는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는 위치로 플런저를 당기고,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볼을 레인에서 필드로 튕겼다. 볼이 필드를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질 좋은 대마초를 피울 때처럼 끝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여러 가지 상념이 내 머릿속에 아무 순서도 없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져갔다. 다양한 사람의 모습이 필드를 덮은 유리판 뒤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유리판은 꿈을 비춰주는 이중 거울처럼 나의 마음을 비추고, 범퍼나 보너스 라이트의 빛에 맞춰 점멸했다. (p.145)

'[리뷰]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로의 초점  (0) 2012.03.29
양을 쫓는 모험  (0) 2012.02.22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0) 2012.02.14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0) 2012.02.03
반딧불이  (0) 2012.02.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