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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book) 순교자

by mariannne 2024. 3. 1.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영미 장편소설



순교자
김은국 저/도정일 역 | 문학동네 | 2010년 08월 | 원제 : The Martyred (1964)

​이 소설을 쓴 김은국 작가는 1932년에 함흥에서 태어나 1947년 남쪽으로 내려왔고, 1950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자마자 6.25 전쟁이 터져 군에 입대하고, 제대 후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불과 9년 후인 1964년에 영어로 된 이 소설을 출간했다. 1967년, 서른 여섯의 나이에 이런 소설을 쓰고, 한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올랐다니, 대단한 일이다.  ​

소설은 시작은 1950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쯤이다. 주인공 이대위는 대학에서 인류문명사를 가르치던 강사로, 전쟁이 나면서 육군에 들어가 장교가 되고, 대위로 진급했다. 육군본부 정보처 평양 파견대의 정치정보국장 장 대령은 그에게 실종된 열 두 명의 목사들의 행방을 조사하라고 명령한다. 열 네 명의 목사가 공산군 비밀 경찰에 체포되었고, 두 명은 살아나왔으며, 나머지는 집단 처형을 당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이대위는 살아남은 신 목사, 한 목사를 만나러 간다. 신 목사는 둘만 살아 나온 이유에 대해 '신의 개입'이었고, '운이 좋았다'며 말을  아꼈고, 젊은 한목사는 미쳐 있어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포로로 잡힌 북한군 증언에 따르면, 열 네 명 목사 중 열 둘은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신을 부정하고, 목숨을 구걸했지만, 신 목사는 북한군에 저항했다고 한다. 한 목사는 미쳐있었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고, 신 목사는 당당한 모습때문에 놓아주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진실과는 상관 없이, 죽은 열 두 목사는 세상에 순교자들로 알려진다. 오히려 신 목사가 배교자로 몰리게 된 것이다.     

내막을 알게 된 이대위는 "선전 목적에 맞추기 위해 진실을 비틀 수는 없"다고 말하지만, 진상 조사를 명령한 장대령은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인데 굳이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고 묻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의견과 상관 없이, 살아남은 신목사의 증언에 의해 열 두 명의 목사는 '순교자'가 되고, 신목사 자신은 '죄인'이 된다.  

소설의 초판 출간 당시 뉴욕 타임스에서는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 카뮈의 위대한 전통 속에 있다"고 평가했다. 작가 필립 로스가 이 소설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 것도 전해진다. 배경은 한국 전쟁이고, 등장인물은 모두 한국인이지만 이 책에서 다룬 주제는 '인간 실존'과 '신(神)',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 서양에서도 이 작품을 주목했다. 작가는, 신이 있다면 왜 선한 이들이 고통을 외면하는 것인지, 진실이라는 건 꼭 밝혀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아마도 무신론자일 작가는 '신은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책 속 구절: 

나는 그때 중위들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고 군목이 들어서고 있었다. 정 소좌가 말했다. "내가 아직 이 사람들한테 그 잘난 순교자들 얘길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끌어낼 건 없잖아? 좌우간, 당신들은 확실히 재밌는 데가 있거든. 자, 여러분, 당신들의 위대한 순교자들이 어떻게 죽었나 알고 싶다고 했지? 당신네의 그 위대한 영웅들, 위대한 순교자들이 꼭 개새끼들처럼 죽어갔다는 말을 들려줄 수 있게 되어 기쁘구먼. 꼭 개새끼들같이 훌쩍거리고, 낑낑거리고, 엉엉 울면서 죽어갔어! 살려달라 아우성을 치고, 자기네 신을 부정하고 동료들을 헐뜯는 꼬락서니라니 과연 한번 보기 좋았다. 그자들은 개처럼 죽은 거야! 개처럼. 알겠어? 모두 죽여버렸어야 하는 건데!"
"왜 모두 죽이지 않았나?" 박 대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왜냐고? 왜 다 죽이지 않았냐고?" 포로는 몸을 둘려 박 군을 마주 바라다보았다. "하나가 미쳐버렸기 때문이야. 돌아버린 거지. 미친개처럼 말야. 난 야만은 아니거든. 미친놈을 쏘진 않아."
"또 한 사람은 왜 쏘지 않았나?" 느닷없이 고 군목의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우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아니, 이건!" 장대령이 소릴 질렀다. 
정 소좌가 고 군목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자는 유일하게 내게 대항했던 자였어. 난 당당하게 싸우는 걸 좋아해. 그자는 용기가 있었어. 내 얼굴에 침을 뱉을 만큼 배짱 있는 친구는 그자 하나뿐이었어. 난 내게 침을 뱉을 수 있는 자를 존경해. 그래서 그자만은 쏘지 않았던 거야. 사실은 쏘아버렸어야 하는 건데.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진작 쏴 죽였어야 했어. 난 너를 알고 있어, 이 가짜 목사야!"
고 군목은 포로의 앞으로 가서 섰다. 그의 주먹이 한 번 날쌔게 번쩍하더니 포로를 마룻바닥에 쓰러뜨렸다. "괴물 같은 것!" 군목이 내뱉었다. (p.140~141)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계속하시오!" 그는 거의 혼몽 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말했다. "말해보시오!"
"말하지요."나는 외치고 있었다. "말하겠어요. 전 목사님이 한 일을, 당신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고 있는 일을 경멸합니다. 거짓말에 거짓말의 연속 아닙니까? 무엇 때문이죠?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열두 명의 목사들은 모두 이유 없이 도륙당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영광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죽음에 대해 당신의 신은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판국에 신을 찬미하다니!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있는 판에 신을 찬미하다니요? 왜 백성들을 배반하시는 겁니까?"
우리 두 사람 모두 침묵했다. 
"목사님, 무엇 때문이죠?" 나는 다시 절망에 잠겨 말했다. "왜 사람들을 속이는 겁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일 뿐 거기에는 우리가 이승 너머에서 찾아낼 어떤 정의로움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을 속여야 합니까?"
[...]
"난 평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는 소곤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고통받는 인간...... 무정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그리고 죽음의 다음은?"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그의 파리한 얼굴에는 엄청난 고뇌가 일고 있었다. 
"날 좀 도와주시오. 불쌍한 내 교인들,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에 시달리는 이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고난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움켜쥐고 그들을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 보내고 있소.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주어야 해요. 영광과 환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무덤 이후의, 죽음 이후에 대한 환상을 주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우린 절망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린 그 절망을 때려 부수어 그것이 인간의 삶을 타락시키고 인간을 단순한 겁쟁이로 쪼그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목사님은요? 당신의 절망은 어떡하고 말입니까?"
"그건 나 자신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는 나 혼자서 짊어져야 하오." (p.253~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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