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는 웬만큼 다 읽었지만, 서점을 어슬렁거리다 작은 판형의 이 책을 발견하고는 덥석 집어들었다. 전에 읽었을까, 기억은 안 나지만 또 읽으면 뭐 어떠랴, 하는 생각으로. 하루키의 에세이는 편집과 표지, 제목을 바꿔 여러 형태로 나오면 어쨌든 그냥 사고 싶어지니, 참 곤란하다.
부제는 "그리운 80년대의 추억"으로, 1982년부터 1986년 초까지 일본 스포츠 종합지에 연재됐던 글을 묶어 낸 책이라 그렇게 정한 모양이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하여 유명해진 후 1987년 "노르웨이의 숲"으로 초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전에 쓴 글들이다. "호민밭의 파수꾼"에 대한 단상에서, "그건 그렇다 치고, 그냥 내버려두어도 한 달에 2, 3만 부나 팔리는 작가의 기분이 궁금하다"(p15)라고 썼는데, 이제는 그 기분을 알게 되었겠지. 주 내용은 당시 읽고 있던 미국 잡지들(에스콰이어, 뉴요커, 라이프, 피플, 뉴욕커 등)을 스크랩하며 생각한 것들이다. 사회적 현상이나 유명인, 연재 소설 등에 관한 단상. 즐겁고 경쾌하고, 짧고 가벼운 글들이라 잠 안오는 밤에 읽기에 무척 좋다. 하루키의 다른 에세이들이 그런 것처럼.
책 속 구절 :
여성잡지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게 뭐 어쨌단 거야?"라고 소리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서 가급적 그런 종류의 잡지는 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달리 읽을거리가 없을 때는 나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얼마 전에도 그런 식으로 "하퍼스 바자" 12월호를 읽게 되었다. (중략)
내가 유일하게 시선을 멈추고 읽은 것은 "지금 가장 매력적인 미국의 독신남 10인"이라는 특집이었다. (중략)
①로버트 라우셴버그 ②톰 크루즈 ③버트 레이놀즈 ④리처드 챔버레인 ⑤데이빗 보위 ⑥존 트라볼타 ⑦톰 셀릭 ⑧워렌 비티 ⑨에디 머피 ⑩리처드 기어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어두워서 한 사람 한 사람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①은 화가, ⑦은 TV탤런트인 것 같고, 나머지는 어떤 사람들인지 대충 안다.
일본에는 사교계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감이 잘 오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독신남(bachelor)'이라고 하면 좀 특이한 어감을 갖고 있다. 애스콧 타이를 매고 애스턴 마틴 같은 차를 타고 칵테일파티에 오는 플레이보이의 이미지이다. 잘생기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며 스릴 있는...... 이런 독신남이 한 명쯤 있으면 그 파티는 더욱 무르익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매력적인 독신남'이다. 무조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면 다 되는 것이 아니므로 이 점 오해 없기 바란다. (p.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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