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소설

기막히게 재미있는 이야기 27가지

mariannne 2012. 10. 21. 17:31


기막히게 재미있는 이야기 27가지

이인환 엮음 ㅣ 성심도서 ㅣ 1991년

 

1992년 초판 2쇄가 나온 이 책을 중고샵에서 구했다. 오래된 것이긴 하지만 중고책은 아니고 새 책이 왔다. 제목이 좀 유치하긴 하지만, O헨리, 알퐁스 도데, 모파상, 서머셋 몸, 체호프, 귀욤 아폴리네르, 헤밍웨이 등 유명한 작가 14인의 단편 27편을 모아놓은 것이다. 역자 이름은 없고, 엮은이(번역자는 아니다) 이름만 나와 있는걸 보니, 정말 옛날책이구나 싶다. O헨리의 단편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처음 읽는 것들이다.

 

서머셋 몸의 “레드” 체호프의 “사모님” 모파상의 “회상”이 기억에 남는다.
“레드”는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키가 여섯 자 하고 한두 치는 되는데다가 그리스의 신처럼 어깨가 넓고 날씬한 것이 마치 “프랙시탈레스가 조각한 아폴로 상과 똑같이 부드러운 곡선에다 순하고 여성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추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신비스러운 데가 있”(p.66)는 레드라는 남자가 한 섬에 와 원주민과 짧은 사랑을 나눈 후 뜻하지 않게 사라지게 된다. 수십년이 지난 후 그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체호프의 “사모님”은 여섯 쪽밖에 되지 않는 짧은 소설이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면 같은 소설이다.
“회상”은 정말 눈물나는 소설이다. 예순두 살의 독신 노총각 사발 씨. 무미건조하고 허무한 삶을 되돌아보던 중, 수십 년 전 친구 부부와 피크닉 떠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 때 친구의 아내와 짧은 시간 산책을 했고, 묘한 여운을 남긴 채 되돌아 왔다. 사발 씨는 친구의 아내를 오래도록 사랑했고, 그 때의 일이 마음에 걸려 이제 와서(사발 씨는 이제 예순두 살이고, 아름다웠던 친구의 아내는 쉰여덟 살의 뚱뚱한 여자가 되었다) 상드르 부인을 찾아 가 그때의 일에 대해 물어본다. 인생은 많은 우연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 소설이다. 순간의 결정과 타이밍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책 속 구절:

“지난날을 회고하며 레드와 샐리의 그 짧고 정열적인 사랑을 생각해 볼 때, 두 사람은 사랑이 아직 절정에 있을 때 자기들을 갈라놓은 그 잔인한 운명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그들은 물론 고통을 겪었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고통이었고, 그들은 사랑의 진짜 비극을 면했던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요.” 선장이 말했다.
“사랑의 진짜 비극은 죽음이나 이별이 아닙니다. 둘 중 어느 한쪽에서 상대에게 무관심해질 때까지 그 사랑이 얼마나 오래 끌었을 것 같습니까? 헤어지면 한시도 못 견딜 만큼 온 마음과 정신을 바쳐 사랑했던 그런 여자를 보며, 이제 다시 만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슬픈 일입니다. 사랑의 비극은 무관심입니다.” (p.80, “레드”)

“그렇다면…… 그날…… 만일…… 만일 내가…… 대답을 했더라면…… 부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녀는 어떤 후회도 없는 여자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이러니가 느껴지는 맑은 목소리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물론 굴복했겠지요.”
그리고 그녀는 발꿈치를 돌려 잼 만드는 곳으로 가버렸다.
사발 씨는 큰 재난을 겪은 사람처럼 완전히 기운 빠진 모습으로 큰 길로 나왔다. 비가 오는데도 그는 곧장 걸었다. 가다 보니 강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둑이 나오자, 오른쪽으로 방향으로 틀어 둑길을 걸었다. 마치 본능에 끌리듯 그는 오랫동안 걸었다. 그의 옷에서는 빗물이 흐르고, 후줄근하게 처지고 모양이 변한 모자에서는 마치 지붕에서처럼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계속해서 곧장 앞만 보며 걸었다.
이윽고 그는 먼 옛날 점심 식사를 한 일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추억은 그의 마음을 쓰라리게 했다.
사발 씨는 잎이 다 져버린 나무 밑에 앉았다. 그리고 울었다. (p.172, “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