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여행책
남미 인권 기행
mariannne
2009. 10. 4. 17:01
남미 인권기행 : 눈물 젖은 대륙, 왼쪽으로 이동하다
하영식 (지은이) | 레디앙 | 2009-04-20
좌편향의 인간은 아니지만 레디앙의 책은 (아직 몇 권 출간되진 않았지만)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신뢰하기 때문에 챙겨 읽는다. 이 책은 레디앙의 책 답게 '여행기'가 아니라 '인권기행'이다. 칠레산 와인을 마시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피노체트가 행한 잔인한 학살의 역사'(p.12)를 생각하면서 차마 목으로 넘길 수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되며, 축구의 나라나 최고 품질의 쇠고기 생산국 아르헨티나 대신 "1970년대에 걸쳐 3만 명의 시민들이 군부독재에 의한 '더러운 전쟁'으로 학살되고 실종된 피의 역사를 간직"한 나라를 떠올리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대한민국을 생각하면서 2002년 한일월드컵이나, 요즘 실컷 삽질을 해대는 '디자인서울'을 떠올리지 않고 1970년대와 1980년대 군부독재 체제를 떠올리며 광주로 향하는 여행자처럼 '학살과 인권탄압'의 잔상을 보기 위해 남미로 날아간 사람이 이 책의 저자 하영식이다. 그는 2006년 9월, 그리고 2008년 2월에 중남미로 가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그리고 쿠바와 니카라과를 비롯한 남미 대륙 전역을 여행한다. 원주민 출신의 대통령(에보 모랄레스)이 탄생한 볼리비아에서 비포장 도로를 7~8시간이나 지나 체 게바라 시신이 수습된 발레그란데를 방문하고, '코카 재배농'과 광부들의 피로 얼룩진 '와누니 사태' 현장을 찾아간다. 그가 칠레에서 독재자 피노체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산디니스타 혁명 당시 소모사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인 용병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전사의 증언이지만)하며 남미 정계인사들이나 혁명 전사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책 속에 답이 있다.
책 속 구절 :
중남미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 군부 독재 체제를 경험했던 한국과 유사한 점이 너무도 많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가장 유사한 점이라면 1980년에 한국에서 일어난 광주학살이나 1970년대에 걸쳐 칠레나 아르헨티나를 위시해서 중남미 세계에서 일어난 자국민들에 대한 정치적 학살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도 대조적이다. 정치적 학살과 잔인한 인권 유린은 냉전 시대에 걸쳐 한국이나 제3세게를 지배하던 미국의 정치적 기술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칠레나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졌던 학살과 인권 탄압의 사례를 보면 지나날 한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쉽게 연상될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중남미지만 결국에는 우리와 같은 운명의 삶을 살고 있고 끈끈하게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민중들의 투쟁과 해방신학의 신부들과 혁명가들의 헌신적인 투쟁이 결국에는 미국의 지배 방식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이다. (p.25)
마을에 사는 몇 가족들을 방문해서 이들의 사정을 들어 보았다. 레오니다스 테르세로(46세)는 이곳에 이주해 온 지 12년째다. 그가 처음 이곳으로 이주해 올 때는 농지를 직접 경작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분배받은 땅을 경작하려고 나섰지만 문제는 농자금이었다. 정부는 경제가 힘들다는 이유로 농자금 대출을 동결시켰고 은행의 농자금 융자도 시간만 끌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농사는커녕 끼니조차 이어가기 힘든 상황에 처하자 분배받았던 농지는 부농에게 헐값에 넘겼고 자신은 부농의 농지에서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농업 노동자로 전락했다.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고 있는 지금 막상 일자리를 찾아 코스타리카로 가는 것도 힘든 지경이라고 한숨을 토해 냈다. (p.239, 킬랄리의 실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