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비소설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mariannne 2001. 12. 8. 13:37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장정일 등저 | 행복한책읽기)

내가 장정일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첫째, 그의 글이 시(詩)건 소설이건 희곡이건 수필, 또는 에세이건 간에 내용이 재미있어 읽기에 즐겁기 때문이고, 둘째, 세상 만사를 향하여 때론 반어적이고, 때론 순진하게 몸사리기도 하며, 때론 확고부동한 자세로 분노하는 그의 주장에 절로 맞장구를 치게 되기 때문이며, 셋째, 그의 문장은 그 자체가 길기도 하거니와 단락이 잘 나뉘지 않아 언뜻 보기에 지리하게 느껴지지만, 아무리 길어도 처음과 끝이 똑 떨어져 물 흐르듯이 읽히기 때문이다.

‘거짓말 사건’ 이후 그가 절필을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했지만,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거라는 걸 믿었고, 또, 그를 아끼는 많은 문인들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책이 나올거라 은근히 기대했기 때문에, 이 책이 나왔다는 얘기가 반가운 한편,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영화로 만들어진 몇 권의 소설 뿐 아니라 “장정일의 독서일기” 시리즈와 “펄프 에세이”, “중국에서 온 편지”, “보트하우스” 까지 즐겁게 읽은 독자라면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또한 꼭꼭 씹어 읽게 될 것 같다.

책의 첫 부분에 실린, 인간 장정일을 만나 그에 대해 써 내려간 인터뷰, 혹은 가벼운 평전 같은 임형욱, 남재일의 글도 그들의 탄탄한 글솜씨 덕에 책 읽는 기쁨을 준다. 술 마시면 없어지고, 왠만한 대구 시내는 걸어다니는 장정일의 특별한 행동, 하루키에 대한 생각, 작은 스파게티집에서, 이런 가게 하나 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 ‘거짓말 사건’에 대한 기대와는 다른 항변 등의 내용. 이어지는 단상 ‘아무뜻도 없어요’는 장정일 특유의 즐거운 산문이다. 익히 알려진 결벽증과 대인기피증에 관한 것, 김희선과 최지우에 대한 알듯말듯한 글,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에 대한 그만의 견해.
이어 작가 장정일에 대한 신철하, 전찬일, 강금실(거짓말 사건의 변호사다)의 작가론과 장정일의 이미 출판된 시 11편, 단편소설(모기), 그리고 소설로 나온 보트하우스의 시나리오 버전이 실렸다. 그의 글을 손꼽아 기다려온 팬 뿐 아니라 한국 작가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있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특별한 선물이 될 것 같다.

오늘 저녁에는 아직 읽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비싸고 고급스러운 양질의 치즈케이크를 먹듯 조금씩 갉아 먹어야겠다!

책 속 구절 :
아내의 평소 지론에 의하면 인생이란 즐기는 것이다. 책이나 공부는 어떤 권리를 얻기 위한 패스포드일지는 몰라도 결코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해변가의 모래밭에서 햇볕을 쬐거나 물장구치기, 산에 올라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거나 절 구경을 하는 것, 강아지나 고양이와 뒹굴며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맛있는 음식이나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 비오는 날 아무것도 안 하고 게으르게 창 밖을 바라보는 것, 공원의 벤치에 누워 햇빛에 물든 나뭇잎의 변화무쌍한 푸름을 즐기는 것,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야기하는 것, 분홍 신을 구해 신고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갈 정도로 춤을 추는 것,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세 끼 식사를 걸러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온종일 입맞추는 것 등등. 음악은 좀 다른 경우에 속하지만 책이나 영화에서 훔치고자 하는 즐거움은 앞서의 즐거움을 대신하는 빈약한 대체물일 따름이다. 열거한 즐거움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거나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확고한 원칙과 각오만 되어있다면 철저히 개인적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오직 개인적인 만족과 즐거움만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