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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브루클린 풍자극

by mariannne 2011. 9. 15.

브루클린 풍자극 The Brooklyn Follies (2005)
폴 오스터 지음 | 열린책들

전직 보험 회사 직원 네이선은 ‘조용히 죽을 만한 장소’로 추천 받은 브루클린에서 뜰이 딸린 방 두 개짜리 저층 아파트를 세낸다. 그는 ‘서글프고도 우스꽝스러운’ 삶을 조용하게 마감하고 싶었다. 이 50대 후반의 이혼남 앞에 이토록 번잡한 상황과 사연많은 사람들이 연이어 나타날 줄을 누가 알았겠나. 아니, 사실 인생이 이렇게 사건의 연속이고 우연과 감동으로 이어지는 법이라는 걸 그는 왜 잊고 살았을까.

아내와 딸에게서 버림받고 브루클린 생활을 시작한 네이선은 동네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열정적 동성애자’ 해리 브라이트먼을 알게 된다. 그는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사람이다. 그리고 곧 해리의 헌책방에서 일하고 있는 조카 ‘톰’과 맞닥뜨린다. 톰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몇 년 전에는 반짝이는 총기를 가진 집안의 기대주였지만 박사 학위 논문을 중도에 포기하면서 택시 운전사로 생계를 꾸리다가 이제는 브루클린 헌책방에서 아무런 기대 없이 쓸쓸하고 고독하게 지내는 남자다. 이전보다 체중이 15에서 16킬로그램 불어 버린 30세의 독신남. 그리고 얼마 후 그들(네이선과 톰) 앞에는 톰의 조카, 그러니까 네이선에게는 손녀뻘이 되는 ‘루시’가 나타난다. 루시는 열 살 밖에 안 된 주제에 종이 쪽지 하나만 달랑 든 채 그들을 찾아왔다. 루시 어린이는 불안정한 엄마 오로라와 열혈신자 의붓아버지에 떠밀려 외삼촌을 찾아 머나먼 길을 온 것이고, 그녀의 엄마 오로라-누드 잡지와 포르노 영화에도 등장한 바 있는 전직가수-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조용히 생을 마감하려던 네이선은 해결해야 할 일들과 돌봐야 할 사람들로 분주해졌는데, 그건 그야말로 제2의 인생이 시작된거라 할 수 있겠고, 인생은 참 살아볼 만한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누구도 삶에 대해 ‘뻔한’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읽는 내내 지루한 줄 몰랐던, 폴 오스터의 소설.

책 속 구절:
그는 차츰차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다시 1년이 더 지났을 무렵에는 너무도 철저하게 고립된 나머지 서른 번째 생일을 혼자서 보내야 했다. 사실 그는 생일 따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고 누구 하나 전화를 걸어 축하를 해주거나 행복을 빌어 주지도 않았으므로 마침내 생일을 기억해 낸 것은 다음 날 새벽 두 시가 넘어서였다. 술 취한 사업가 두 사람을 어슬리 딜라이트(현세의 즐거움) 가든이라는 스트립쇼 클럽 앞에서 막 내려 주고 난 뒤 퀸스 어딘가에서. 네 번째로 맞이하는 새로운 10년을 자축하기 위해 그는 노던 불르바드에 있는 메트로폴리탄이라는 간이식당으로 차를 몰고 간 다음 계산대 앞에 앉아서 초코릿 밀크셰이크와 햄버거 두 개, 감자튀김 한 접시를 주문했다.
해리 브라이트먼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얼마나 더 오랫동안 그 연옥에 머물렀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p.39)

나는 즐거움과 행복에 대해, 머릿속의 생각이 잠잠해지고 세상과 하나가 된 느낌이 드는 그 진귀하고 예기치 못한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6월 초의 날씨에 대해, 조화와 복된 휴식에 대해, 나무들의 푸른 잎사귀를 지나 쏜살같이 날아가는 울새와 방울새와 지빠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잠의 이로움에 대해, 먹고 마시는 즐거움에 대해, 오후 두시에 햇살 속으로 나섰다가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 주는 대기를 느낄 때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톰과 루시에 대해, 스탠리 차우더에 대해, 우리가 차우더 여관에서 묵었던 나흘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남부 버몬트의 그 언덕마루에서 했던 생각과 꾸었던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짙은 청색의 땅거미와 장밋빛의 나른한 새벽과 밤이면 숲에서 울부짖는 곰들을 기억하고 싶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 너무 큰 욕심이라면 그중 몇가지라도. 아니, 기왕이면 몇 가지보다는 거의다. 잃어버린 것들을 위한 여백을 남겨 놓고 싶다. (p.213~214)

점심 식사 시간. 우리 네 사람은 식당 테이블에 둘러앉아 차갑게 식혀서 썬 고기와 과일과 치즈를 먹고 있었다. 이제 안개는 걷혔고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에 그 방 안의 모든 물건이 더 분명하고 더 생생하고 더 선명하게 보였다. 여관 주인은 우리에게 자기의 슬픈 삶을 토로하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거기에 같이 있다는, 내 몸으로 앉아 있다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들을 보고 있다는, 내 폐로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며 내가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삶이 끝난다는 것을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영원히 언제까지고 살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안된 일인지. (p.230)

[…] 나는 단지 최근에 들어서야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뿐이고, 브루클린에 정착하기로 한 내 결정에 완전히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교외에서 보낸 뒤, 나는 도시가 내게 맞는다는 것을 알았고 이미 내 이웃에, 백인종과 황인종과 흑인종이 들거나며 뒤섞여 사는 것에, 가지각색으로 다른 외국의 억양이 합쳐진 소리에, 그곳의 아이들과 나무들에, 열심히 살아가는 중산층 가정에, 레즈비언 커플들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에, 길거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하는 헐렁한 흰 옷을 걸친 인도인 성자들에게, 그곳의 난쟁이들과 불구자들에게, 보도를 따라 굼벵이 걸음을 걷는 늙은 연금 수령자들에게, 그곳의 교회 종소리와 수천 마리 개들에게, 지하 셋방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길거리를 따라 손수레를 밀고 돌아다니며 빈병과 폐품을 찾아 뒤지는 떠돌이 넝마주이들에게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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