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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by mariannne 2008. 9. 7.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은이) | 민음사

그 마을 사람들은 밤새 잠도 안 자고 뭘 하는 걸까.  전날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고, 다음날 새벽에 주교의 배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잠을 설친 것인지, 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하루가 일찍 시작되는 게 보통의 생활 리듬인지 모르겠다. 살인의 동기가 될 만한 사건이 자정 이후 발생하고, '예고된 죽음'은 동트기 전 단 몇 시간 동안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을 뿐이지만, 새벽녘에는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살인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과 그 이유까지 모두 알게 된다. - '주교의 배가 고동을 울렸을 때는 거의 모든 주민이 주교를 영접하기 위해 잠에서 깨어 있었고, 비까리오 형제가 산띠아고 나사르를 죽이기 위해 기다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우리 몇 사람뿐이었는데, 그때는 이미 살인의 세세한 이유까지 소상히 알려져 있었다. (p.76~77)

결혼식 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밤새 술을 마신 후, 새벽녘에 그 결혼식에 문제가 생기고, 날이 밝기 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부검 결과 '전면에서 두 번에 걸쳐 깊이 찔리는 바람에 간이 거의 잘렸'고, '위는 네 군데를 찔렸'고, '그 가운데 하나는 몹시 깊이 찔려 위를 완전히 꿰뚫고 나가 췌장까지 파괴해 버렸'(p.96)을 정도의 끔찍한 살인이다. 살인을 강행한 쌍둥이는 피로감과 '평생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확신', 그리고 실제로 '열한 달 동안 깨어 있었(p.102)'다는, 믿을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체험했지만, 어떠한 복수도 없었고, 3년 후 사면된다. 이 사건의 최대 희생자는 '불쌍한 바야르도' 한 사람인데, 그를 동정하는 건 과연 옳은 것일까?  

소설의 소재가 되는 사건은 실제로 마르께스가 체험한 것이고(작가는 30년 이상이나 이 사건을 소설로 쓰려고 기다렸다), 오늘 이 땅 위에서도 자행되고 있는 '명예살인'에 관한 것이다. '집단적 책임'과 '정당한 폭력'의 문제, 그리고 '숙명주의'인가 '불운한 우연'인가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일이다. 1980년대 초반에 쓰여진 작품이지만,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마르께스의 다른 소설처럼, 이 작품 역시 십수 년, 아니 수십 년 동안의 세월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준다. '17년을 하염없이 계속해서 편지를 써' 가는 사람과 '살이 찌고,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고, 가까이 있는 것을 보려면 안경이 필요'한 나이가 되어서 '이천여 통'의 편지를 들고 돌아온 사람. 그 세월은 도대체 얼마나 긴 것일까.

책 속 구절 :
루이스 엔리께는 비몽사몽간에 주교가 타고 온 배의 첫 고동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는 떠들썩한 파티에 녹초가 된 몸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데, 얼마 뒤 수녀 여동생이 달리기 경주를 하는 사람처럼 허둥지둥 침실로 뛰어 들어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그를 깨웠다.
"그들이 산띠아고 나사르를 죽였어!" (p.92)

[...] 산띠아고 나사르의 가혹한 운명을 생각했다. 그는 20년 동안 누린 행복의 대가로 죽음을 당했을 뿐 아니라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결국 산산이 흩어져 소멸해 버린 것이다. (p.99)

[...] 바다가 바라보이는 집 창가에서 가장 더운 시각에 금발이 잿빛으로 변한 여자가 쇠테 안경을 끼고 가벼운 상복을 입은 채 기계 자수를 놓고 있었고, 여자의 머리 위에 매달린 새장 속의 카나리아는 쉼 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목가적인 액자에서 보이는 창틀 안에 들어 있는 여자의 모습에서 나는 인생이 그렇게 영락없는 싸구려 소설처럼 끝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바로 내가 당시까지 생각하던 바로 그 여자일 것이라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23년이 지난 뒤의 앙헬라 비까리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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