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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소설

레디메이드 인생

by mariannne 2023. 1. 26.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 저 / 한형구 편 | 문학과지성사 

친일파 작가로 알려져 있는 채만식은 1902년 군산에서 태어나 1950년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레디메드 인생"(1934), "태평천하"(1938), "탁류"(1938) 등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친일파인데 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채만식의 작품이 실리고, 여전히 그의 소설이 널리 읽히는 걸까? 

채만식은 스물 셋에 소설가로 등단한 후 동아일보 기자로 잠깐 일하다가 그만두고, 서른 무렵부터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KAPF(카프, 1925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구성원 대량 검거 사태를 계기로 2년여 동안(1934~1935) 절필하기도 했는데, 이후 발표한 소설들이 큰 인기를 끌면서 중견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거기까지였다면 좋았겠지만, '개성 독서회 사건'(1938)을 계기로 일제의 압력과 회유에 굴복하여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채만식의 이름 앞에 '친일파'라는 글자를 남긴다. 창씨개명과 단발령은 거부했지만, 체제에 순응, 또는 찬양하는 글을 써 오명을 남기게 된 것이다. 해방 이후 그는 "민족의 죄인"이라는 작품으로 자신의 친일을 고백하는데, 변명이면서 사죄문인 이 작품이 면피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다른 친일작가와는 달리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실리는지도. 어쨌거나 당시 작가 중에서, 혹은 그 이후의 많은 소설가 중에서도 이처럼 풍자 소설을 잘 쓴 사람이 얼마나 있을라나. 그의 소설을 두고 '비판적 리얼리즘' '진보적 리얼리즘'이라는 평을 하기도 하는데, 그가 10년만 더 살아있었더라면 어떤 소설을 썼을지,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이 소설집에는 표제작인 "레디메이드 인생"을 비롯해 "민족의 죄인" "치숙" "낙조" 같은, 일제시대와 해방기를 맞이한 서민들의 웃지못할 생활상을 보여주는 소설들이 담겨 있다.  그가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유명해지지 않았더라면 일제강점기가 무슨 대수라고, 그저 먹고 살기 바빠 입에 풀칠하며 해방도 즐거운줄 모르는 신기료장수 방삼복("미스터 방"의 주인공) 처럼, "우랄질! 독립이 배부른가?"라며 투덜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책 속 구절: 

인텔리...... 인텔리 중에도 아무런 손끝의 기술이 없이 대학이나 전문학교의 졸업 증서 한 장을 또는 조그마한 보통 상식을 가진 직업 없는 인텔리...... 해마다 천여 명씩 늘어가는 인텔리...... 뱀을 본 것은 이들 인텔리다. 
부르주아지의 모든 기관이 포화 상태가 되어 더 수요가 아니 되니 그들은 결국 꾐을 받아 나무에 올라갔다가 흔들리는 셈이다. 개밥의 도토리가 아니다. 
인텔리가 아니 되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퍼센트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텔리요, 무기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p.47, 레디메이드 인생)

"그런데 자넨 월급봉투에다 목구멍을 틀얹지 않드래두 자네 어룬이 부자니깐, 먹구 사는 걱정은 없는 사람이라 선뜻 신문기자의 직업을 버리구 말았기 때문에 자넨 신문을 맨든다는 대일 협력을 아니한 사람,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그렇다면, 걸 재산적 운명이라구나 할는지, 내가 결백할 수가 없다는 건 가난했기 때문이요, 자네가 결백할 수가 있었다는 건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이요 그것밖에 더 있나? 자네와 나와를 비교, 대조해서 볼 땐 적어두 그렇잖아? 물론 가난하다구서 절개를 팔아먹었다는 것이 부꾸런 노릇이야 부꾸런 노릇이지. 또 오늘이라두 민족의 심판을 받는다면, 지은 죄만치 복죄(伏罪)할 각오가 없는 배두 아니구. 그렇지만 자네같이 단지 부자 아버질 둔 덕분에 팔아먹지 아니할 수가 있었다는 절개두 와락 자랑거린 아닐 상부르이." (p.148, 민족의 죄인) 

"쑥꾸욱."
"쑥꾸욱."
형체는 안 보이고 울음소리만 들린다. 
"쑥꾸욱."
"쑥 쑥꾸욱."
산을 돌아 넘어가는지 소리가 감감하니 멀어간다. 
미럭쇠는 옛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며느리가 해산을 했는데 야속한 시어미가 미역국을 안 끓여주고 쑥국만 끓여주었다. 
며느리는 피가 걷히지 않고 속이 쓰리다 못해 삼칠일 만에 그만 죽었다. 
그 며느리가 죽어 혼이 새가 되었는데 쑥국에 원한이 잦아져 그래서 밤낮 쑥꾸욱 쑥꾸욱 운다고 한다. 
"우리 납순이는 죽어서 무엇이 되었으꼬? ...... 쑥국새가 되었으머는 우는 소리나 듣지!"
미럭쇠는 우두커니 쑥국새 우는 곳을 바라보다가 소스라쳐 한숨을 내쉰다.
"쑥꾸욱."
"쑥 쑥꾸욱."
마지막 소리가 아스란히 들리더니 그 다음은 잠잠하다.
미럭쇠는 밥 먹기도 잊고 도로 넋이 나가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 (p.270~271, 쑥국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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