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저 | 창비
권여선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게 작년인데, 20년 전에 등단한 이 작가를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까. 미안한 얘기지만 작가의 이름도 평범하고, 그동안 출간한 책의 제목도 하품나게 심심해서였을거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나 "푸르른 틈새" 같은 것들. 게다가 2008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도 "사랑을 믿다"라니.
이 소설집은 2016년 봄에 출간되었는데, 그즈음에 책 소개 코너에서 제목을 눈여겨 봤고, 그러다가 얼마전 잘 아는 후배의 추천까지 받은 바람에, 읽었다. 내 취향에 아주 잘 맞는 소설로, 한 편 한 편 읽어버리는 게 아깝기만 했다. 나이가 더 들어버린 정이현을 만난 느낌이랄까.
소설집 속에 "안녕 주정뱅이"라는 소설은 없다. 다만 모든 단편에 '술'이 등장하고, 작가가 '30년 넘는 음주이력'을 가진 애주가여서 그런 제목을 지었을 것이다. 소설 주인공들은 저마다 미친듯이 술을 마시는데, 라면 안주에 소주를 마시는 장면같은 건 작가가 입맛을 다시며 썼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하는 "실내화 한켤레"와 "이모"가 가장 좋았다.
나중에 생각나지 않을까봐 써 놓는 줄거리
봄밤
마흔셋에 만난 동갑내기 커플 수환과 영경은 이후 12년간 늘 함께였다. 남자는 신용불량자에 건강보험증이 없어 류머티즘 관절염 증세를 제때 치료받지 못해 결국 중증환자로 지방 요양원에 입주했고, 여자는 알콜중독증세로 같은 곳에 들어가게 된다. 여자는 술을 끊지 못해 자주 외박을 나가 술을 마셨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이해했다. 여자가 외출한 어느 날, 남자는 요양원에서 사망한다. 여자는 술을 마신 후 의식불명 상태로 모텔에서 발견된다.
삼인행
훈은 이혼을 앞둔 부부 규, 주란과 동해로 1박 2일 여행을 떠난다. 주란이 운전을 했고, 훈은 밥값을 냈다. 원주에서 삼계탕을 먹고, 저녁에는 바닷가에서 홍게를 먹었다. 밤에 콘도로 가서는 낮에 경포해변에서 사온 햄버거를 안주삼아 맥주와 양주를 마셨다. 다음날은 서울로 향하며 황태국집에서 소주 두 병을 시켜 나눠마신다.
이모
어느날, 있는 줄도 몰랐던 시이모가 췌장암에 걸렸다며 여동생인 시어머니에게 연락을 해왔다. 시이모는, 동생들 뒷바라지로 젊은 날을 보냈고, 특히 남동생의 빚을 갚느라 신용불량자가 되기까지 했으며, 쉰살이 가까워 신용을 회복했고, 그다음 5년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아 1억 5천만 원을 모은 후, 편지 한통을 써놓고 사라졌다. 그동안 그녀는 아파트 한 채를 구해 반전세로 살면서, 한 달에 35만 원 생활비만 쓰며 도서관에 가 책을 읽으며 지냈다. 그러다가 췌장암에 걸려 여동생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시이모와 친하게 지냈고, 그녀는 죽으면서 나에게도 유산을 남겼다. 그녀가 검소한 생활을 하며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카메라
두어 달 만나고 연락이 끊긴 남자. 알고 보니 그는 여자에게 카메라를 선물하려고 들고 걸어가다 사소한 오해로 불법체류자에게 맞아 죽었고, 그녀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역광
예술인 숙소에서 만난 '위현'이라는 남자는 시력을 거의 상실한 전직 번역가다. 여자는 그와 친해지기 위해 낮술을 권했고, 둘은 점심 식판에 있는 김치전, 돼지불고기, 두부조림, 열무김치로 밤까지 술을 마신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여자가 상상해 낸 가공의 인물이었지만.
실내화 한켤레
시나리오 작가가 된 경안은 14년 만에 연락을 해온 여고동창 혜련, 선미의 갑작스런 방문이 당황스러웠다. 둘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줌마들이었고, 각종 술과 안줏거리를 사들고 경안의 원룸에 쳐들어왔다. 낮부터 마시기 시작한 술은 밤까지 이어졌고, 아는 언니의 남자친구까지 불러들여 술을 마시다가 모두 만취해 잠이 든다.
층
헬스클럽 트레이너인 남자의 누나는 정신지체가 있었다. 열일곱 살부터 가출을 반복한 누나가 어느날 임신을 한 채로 집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남자는 어머니와의 통화해서 누나를 '미친년'이라고 하며 화를 낸다. 남자와 썸을 타기 시작한 여자는 우연히 이 통화를 듣고 기겁을 하며 남자와 연락을 끊고, 남자는 이전에 술자리를 함께 한 사촌이 여자에게 누나의 존재를 알린 거라 생각하고 분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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